소득 높아서, 실거주 안 해서 ‘NO’… 전세사기 피해지원 ‘급’ 나눈 정부

심윤지 기자 2023. 4. 2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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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 저리대출 지원
‘임차권등기·실거주’ 요건 모순돼
연소득 7000만원 초과 땐 제외
보증금 3억원 이상 지원 배제도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의 실효성있는 대책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사는 A씨 부부는 2019년 전세로 들어간 첫 신혼집에서 보증금 8000만원을 떼였다. 만기 4달 전부터 연장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집주인은 “다음 달에 돈을 주겠다”며 큰소리만 쳤다. 아이가 태어나 더 큰 집이 필요해진 부부는 2년 전 임차권등기를 설정한 뒤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다.

A씨 부부는 이것이 ‘전세사기’였음을 최근에서야 인지했다. 알고보니 같은 집주인에게 당한 피해자만 최소 100명이 넘었고, 경찰 수사도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A씨는 정부로부터 ‘피해임차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계약 종료 1개월 이상 경과, 보증금 30% 이상 미반환, 임차권등기 설정, 기존 주택 실거주 등 총 4개 요건 중 마지막 실거주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2월 ‘전세사기 예방 및 피해 지원방안’을 발표하며, 기존 주택에서 이사를 나가는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연 1~2%대 주택도시기금 대출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대환대출 상품이 출시된 24일부터는 새로 이사를 가는 피해자들 뿐 아니라, 기존 집에 계속 살고 있는 피해자들도 저리대출로 ‘갈아타기’가 가능하다. 이사를 나가든,그대로 머물러 살든 조건은 피해주택에 머물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A씨는 이미 이사를 갔기 때문에 지원대상이 안된다.

문제는 임차권 등기설정과 기존 주택 실거주 조건을 동시에 둔 정부 기준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통상 임차권등기는 계약 만료 후 이사를 가더라도 임차인 대항력을 유지하기 위해 설정하는 것이서 임차권등기를 하면서 실거주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A씨도 이사를 나가면서 임차권등기설정을 했다.

A씨는 “전세사기를 당한 집에 그대로 살건, 그 집에서 나왔건 큰 금전적 피해로 막막한 처지인건 마찬가지”라며 “왜 정부가 복잡한 조건들을 달며 피해자들의 ‘급’을 나누고 분열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부로부터 주택도시기금 저리대출을 지원받을 수 있는 피해임차인 요건. 피해자들은 임차권등기와 실거주 요건이 서로 충돌한다고 지적한다. 국토부 제공

피해 임차인으로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깐깐한 소득·자산 기준을 넘어야 한다. 주택도시기금은 서민층의 주거안정을 위해 조성되다보니, 주거비대출지원 상품에 연 소득 부부합산 7000만원 이하·보증금 3억원 이하 안팎의 상한을 두고 있다. 이 기준은 정부의 전세피해자 저리대출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됐다.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는 전세사기 피해자 B씨는 정부가 대환대출 상품 출시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연 소득이 7000만원을 넘어 대상에서 제외됐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2년이 갓 지난 그는 지난 2월 전세계약이 만료된 뒤 한 달 이자만 95만원씩 내고 있다.

그는 “모아놓은 돈이 없고 연봉만 7000만원인 사회초년생과 자산 1억에 연봉 6500만원인 직장인이 있다고 하면, 현재 기준으로는 전자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며 “소득 조건에 따라 피해 지원을 막는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했다.

보증금 3억원 이상인 피해자들도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국토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피해는 훨씬 큰데도 도움은 커녕 피해자로 인정을 받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이자를 더 낼테니 현행 저리대출 한도인 2억4000만원까지는 누구나 제한 없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썼다.

보증금 3억100만원이라고 밝힌 피해자 C씨는 탄원서에서 “난치병을 앓으면서 당장 가족 모두를 부양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며 “피해자들 모두 넋이 나간 상태로 삶의 희망도 없이 매일매일 이자 갚기 급급하다”고 했다. 이어 “한달에 100만원을 모아도 30년이 돼야 모든 걸 갚을 수 있다”며 “앞으로는 전세금만큼의 경매금도 마련해야 하는데 이대로는 버텨낼수가 없다”고 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지금도 주택도시기금 대출상품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어 연말마다 20%씩 예산을 증액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소득이나 자산 요건을 완전히 없앨 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서민층의 내집 마련과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의 기준을 전세사기 피해지원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 피해자들 주장이다.

정부의 이러한 방침이 전세사기 피해규모를 축소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4일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1월31일부터 4월14일까지 전국에서 전세피해확인서를 발급받은 피해자들은 단 141명 뿐이었다. 서울·인천 뿐 아니라 경기 화성·부산·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연달아 터지는 상황임에도, 제대로 된 실태 파악조차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김준형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의 전세사기 대응이 매입임대주택 등 기존 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가고 있다 해도, 기존 제도의 지원 요건을 맞추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어쩔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한 처사”라며 “소득이 높은 사람도 지원을 해주되 개인적 부담을 더 늘리는 방식으로 변형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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