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고 갑시다, ‘전세사기’와 ‘보증사고’의 다른 점
정부 ‘특별대책’에도 ‘피해 주택’ 기준 모호
(시사저널=조문희 기자)
전국적으로 '전세 사기' 피해에 스포트라이트가 쏠리고 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이를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세 사기와 '보증 사고'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당국은 일단 "전세 사기를 엄단하고 피해자를 적극 보호하겠다"는 기조 하에 각종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피해 주택 선정 기준은 아직까지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부동산 경기 악화로 '역전세' 현상이 속출하는 국면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어디까지 구제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갭투자' 했다고 전부 '사기'는 아니다
전세 세입자가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일을 '전세 사기'로 통용해 부르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세 사기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갈취할 목적으로 세입자를 기망하는 엄연한 범죄 행위이다. 의도적으로 집값과 보증금을 부풀려 계약을 맺거나, 세입자 몰래 근저당을 설정하거나 명의를 변경하는 식으로 조직적 전세 사기가 이뤄진다.
서울 화곡동 '빌라왕' 사건이 대표적이다. 1100채가 넘는 빌라와 오피스텔을 임대했다가 사망한 빌라왕 사건은 시세 파악이 어려운 빌라의 허점을 악용해 세입자의 보증금만으로 수천 개의 매물을 사들인 뒤, 갚을 능력이 없는 신용불량자의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해두는 식으로 사기 행위가 이뤄졌다.
반면 계약 기간이 만료됐는데도 보증금을 제때 반환받지 못하는 것은 더 넓은 의미의 '보증 사고'에 해당한다. 지금과 같은 부동산 시장 침체기엔 이 같은 보증 사고가 속출할 수 있다. 부동산 경기가 나빠져 전세 보증금이 매매가를 초월하게 된다면, 집주인 입장에선 집을 팔더라도 돌려줄 보증금만큼을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어서다. 단순 보증 사고의 경우 집주인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쉽지 않아 법적 처벌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동탄 오피스텔' 사태가 보증사고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게 일부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동탄 오피스텔 사태는 한 부부가 '갭투자'로 250채의 매물을 쓸어들이면서 촉발됐다. 계약한 전세 보증금은 매매가보다 높게 불렀다. 갭투자는 전세를 끼고 적은 자본금으로 집을 사는 투자 방식을 뜻한다. 처음부터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리스크를 인지하고도 의도적으로 무자본 갭투자를 하기 위해 전셋값을 높여 계약했다면 사기 혐의가 인정될 수 있지만, 이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단순 집주인의 '투자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해당 부부는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보증사고 '시한폭탄'에 떠는 세입자
법적 관점에서 볼 때 보증금 갈취의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전세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지만, 세입자 입장에선 다른 얘기다. 보증금 반환이 지연될 경우 세입자로선 전세 사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전국적으로 세입자들의 불안감은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피해지원센터 방문자수는 4160명, 상담건수는 8524건에 달했다.
세입자들의 불안감은 기우가 아니다. 최근 집값 하락 국면이 지속되면서 역전세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보증 사고 위험을 안고 있는 '시한폭탄'이 포진해있는 상황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제출된 주택자금 조달계획서상 전세가가 매매가의 80%를 넘는 갭투자 거래는 모두 12만1553건으로 집계됐다. 집값이 더 떨어지면 해당 매물들은 '깡통 전세'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보증금을 제때 제대로 반환받기 어려울 수 있다.
정부의 고민도 깊은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연달아 전세 사기 피해 관련 대책을 내놓고 있다. 전날(23일) 당정협의회는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피해 주택을 매입해 세입자에게 최장 20년 동안 임대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적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다만 전세 사기 피해 주택 선정 기준과 우선 매수 가격 기준 등 구체적 내용은 발표하지 않았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도 이날 "전세사기 피해와 집값 하락기에 나타나는 보증금 미반환 현상을 어떻게 구분 지어 어디까지 국가가 관여하고 지원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다"며 "다 지원해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800만 전세 계약 모두에 대해 국가가 지원할 수는 없다. 선을 넘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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