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되풀이되는‘86 용퇴론’[김지현의 정치언락]
김지현 기자 2023. 4. 24. 12:00
더불어민주당에는 각설이도 아니고,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설’(說)이 하나 있습니다. “86들이 용퇴해야 산다”라는, 이른바 ‘86 용퇴론’입니다.
86그룹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세대로, 1995년 이래 386(30대), 486(40대), 586(50대)으로 불리며 민주당의 주축으로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현재 민주당 내 최대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도 86그룹 모임이고, ‘민주주의 4.0’과 ‘사의재’ 등 친문(친문재인) 모임 내에도 86 출신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습니다.
이번에 2021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 의혹’으로 파문을 일으킨 송영길 전 대표도 86그룹 맏형격이죠. 이번 사태에 “대체 언제적 86이냐”부터 “86그룹이 언제까지 해 먹는 거냐”는 반응이 적지 않더군요.
돌이켜보면 ‘86 용퇴론’은 2015년부터 거의 10년째 도돌이표처럼 반복돼 왔습니다. 일단 ① 당이 위기일 때 ② 선거를 앞두고 ‘혁신’ 키워드가 필요할 때 반짝 등장했다가 ③ 고비를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싹 들어가는 패턴입니다.
86그룹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세대로, 1995년 이래 386(30대), 486(40대), 586(50대)으로 불리며 민주당의 주축으로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현재 민주당 내 최대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도 86그룹 모임이고, ‘민주주의 4.0’과 ‘사의재’ 등 친문(친문재인) 모임 내에도 86 출신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습니다.
이번에 2021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 의혹’으로 파문을 일으킨 송영길 전 대표도 86그룹 맏형격이죠. 이번 사태에 “대체 언제적 86이냐”부터 “86그룹이 언제까지 해 먹는 거냐”는 반응이 적지 않더군요.
돌이켜보면 ‘86 용퇴론’은 2015년부터 거의 10년째 도돌이표처럼 반복돼 왔습니다. 일단 ① 당이 위기일 때 ② 선거를 앞두고 ‘혁신’ 키워드가 필요할 때 반짝 등장했다가 ③ 고비를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싹 들어가는 패턴입니다.
송영길 “정치적 책임지겠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22일 오후(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한 사무실에서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관련 입장을 밝히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송 전 대표는 이날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고 민주당을 탈당하겠다”면서도 관련 의혹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파리=뉴스1 |
● 선거 때면 나왔다가, 선거 끝나면 사라진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016년 총선을 1년 앞두고 치러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했습니다. 지금 민주당 상황과 비슷하네요. 당시 33세의 이동학 청년 혁신위원은 전대협 1기 출신이자, 86그룹의 대표주자였던 이인영 의원에게 ‘586 전상서-더 큰 정치인으로 거듭나 달라’는 제목의 공개 편지를 보냅니다.
“‘전대협 세대’는 든든한 후배 그룹 하나 키워내지 못했고 후배 그룹과 소통하지도 않았다. (중략) 시대는 빠르게 변해 가는데 (586세대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어젠다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중략) 이제는 선배께서 당이 찾아야 할 활로가 돼주는 건 어떻겠느냐.”
기득권을 내려놓고 험지로 가라는 메시지에 당이 발칵 뒤집혔죠. 이 의원은 A4 용지 7장짜리 답장에서 “근본적 성찰이 없다면 공학적 처방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지역구(서울 구로갑)가 쉬운 지역이라는 평가에 대해선 “자갈밭을 일구는 심정으로 지난 15년을 보냈지, 문전옥답을 물려받은 편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역시 86그룹 소속인 임미애 혁신위원이 “86그룹은 아직도 1987년의 지나간 잔칫상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권력이라는 괴물과 싸우다 86세대가 또 다른 권력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재반박하는 등 갈등이 잔뜩 고조됐습니다.
하지만 패턴 ③이 ‘고비를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들어간다’였죠?
민주당이 2016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2017년 탄핵을 거쳐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면서 86그룹은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전대협 3기 의장 출신인 임종석 전 의원이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됐고, 험지로 내몰리던 이 의원은 원내대표로 선출되는 등 용퇴는커녕 ‘86 전성시대’가 열린 겁니다.
하지만 여의도에서 황금기는 길게 허락되지 않죠. ②‘선거철이 되면 돌아온다’라는 법칙에 따라 2020년 총선을 앞두고 2019년 말 어김없이 ‘86 용퇴론’이 재등장했습니다. 조국 사태 여파로 ‘공정’이 최대 화두로 떠올랐을 때입니다. “기득권이 돼 버린 86그룹부터 물러나야 한다”라는 분위기 속에 임 전 비서실장이 “제도권 정치를 떠나겠다”라며 총선 불출마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앞서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이철희 전 의원도 “하나의 세대, 그룹으로서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이제는 갈 때”라고 불을 지폈습니다.
그래 놓고 결국 다시 ③의 반복입니다. 민주당이 2020년 총선에서 180석을 확보하면서 86그룹도 대거 생환해서 돌아온 거죠. 그냥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고, 당 지도부 등 요직을 꿰찼습니다. 21대 국회 첫 원내대표엔 김태년 의원(전대협 1기 부의장)이 뽑혔고, 2021년엔 역시 86그룹인 윤호중 의원이 원내사령탑을 맡았습니다. 송 전 대표도 이 해 전당대회에서 당선됐죠. 당시 송 전 대표와 겨뤘던 홍영표, 우원식 의원 모두 86그룹입니다.
그래 놓고 결국 다시 ③의 반복입니다. 민주당이 2020년 총선에서 180석을 확보하면서 86그룹도 대거 생환해서 돌아온 거죠. 그냥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고, 당 지도부 등 요직을 꿰찼습니다. 21대 국회 첫 원내대표엔 김태년 의원(전대협 1기 부의장)이 뽑혔고, 2021년엔 역시 86그룹인 윤호중 의원이 원내사령탑을 맡았습니다. 송 전 대표도 이 해 전당대회에서 당선됐죠. 당시 송 전 대표와 겨뤘던 홍영표, 우원식 의원 모두 86그룹입니다.
2022년 1월 말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패색이 짙어지자, 아니나 다를까 86 용퇴론의 법칙에 따라 똑같은 주장이 또! 나옵니다.
송 전 대표가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저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라고 승부수를 던진 겁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뒤를 따르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송 전 대표는 고작 3개월 뒤 당내 거센 반대에도 서울시장 출마를 강행하면서 스스로 ‘용퇴’의 의미를 퇴색시켰죠. 20년 이상 내리 인천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송 전 대표의 난데없는 서울시장 도전장에 “용퇴가 장난이냐”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
그 당시 위기 수습차 투입된 1996년생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86 용퇴를 논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선거를 앞두고 논의할 내용은 아니다”라고 반대하는 86 출신 윤호중 당시 공동비대위원장과 고성을 내지르며 싸우기도 했죠. 그렇게 ‘86 용퇴냐 아니냐’를 두고 자중지란만 이어가던 민주당은 당연히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했습니다.
●돌고 돌아 또 ‘86 용퇴론’
2023년 4월, 어느덧 총선이 또 1년 앞으로 다가왔으니 다시 86 용퇴론이 나올 때가 됐죠?
“총선을 1년 앞두고 386 정치인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었던 송 전 대표가 (연루됐다). 민주당 전체가 국민의 신뢰를 완벽히 잃어버릴 수 있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이원욱 의원)라는 등 86그룹에 대한 비판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한 가운데, 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는 내년 총선에선 동일 지역구 3연임 제한을 요구하는 등 재차 세대 교체론이 불어닥칠 듯한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마침 이번 사태 직전 1988년생 초선 오영환 의원이 아래와 같은 말과 함께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죠.
“책임져야 할 사람이 기득권과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이 우리 정치에서 가장 먼저 개혁돼야 할 대상이다. 말만 앞세운 개혁에 무슨 힘이 있느냐고 국민들이 묻는다. 전 그 물음에 ‘내려놓음’이란 답을 드린다.”
지난 10년간 민주당 내 86 용퇴론이 늘 용두사미로 끝난 건 ‘기득권화’라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보여주기식 선거용 레퍼토리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썩은 부분을 제대로 도려내진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싸잡아 ‘다 나가라’는 무책임한 방식이다 보니 매번 정치적 이슈로만 소모되고, 결과적으로 쇄신은 안 됐던 겁니다.
86그룹은 이번에는 타의에 쫓기듯 밀려나기보다는 당의 중진답게 진정성 있는 쇄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겁니다. 자기들끼리 감싸고 엄호하기 전 우리 사회가 왜 유독 자신들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한 번 돌아볼 때입니다. 감동 없는 쇄신에 거듭 속아줄 유권자는 없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끈 정치드라마 ‘퀸메이커’에서 나온 대사로 칼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나쁜 X이 나쁜 짓 한 거랑, 좋은 X이 나쁜 짓 한 건 천지 차이야. 나에 대해 뭘 까발리든지 정의로운 코뿔소(주인공)가 서민 뒤통수 때린 건 이제 덮을 수가 없어. 그게 정치판 생리란다.”
송 전 대표가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저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라고 승부수를 던진 겁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뒤를 따르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송 전 대표는 고작 3개월 뒤 당내 거센 반대에도 서울시장 출마를 강행하면서 스스로 ‘용퇴’의 의미를 퇴색시켰죠. 20년 이상 내리 인천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송 전 대표의 난데없는 서울시장 도전장에 “용퇴가 장난이냐”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
그 당시 위기 수습차 투입된 1996년생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86 용퇴를 논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선거를 앞두고 논의할 내용은 아니다”라고 반대하는 86 출신 윤호중 당시 공동비대위원장과 고성을 내지르며 싸우기도 했죠. 그렇게 ‘86 용퇴냐 아니냐’를 두고 자중지란만 이어가던 민주당은 당연히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했습니다.
●돌고 돌아 또 ‘86 용퇴론’
2023년 4월, 어느덧 총선이 또 1년 앞으로 다가왔으니 다시 86 용퇴론이 나올 때가 됐죠?
“총선을 1년 앞두고 386 정치인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었던 송 전 대표가 (연루됐다). 민주당 전체가 국민의 신뢰를 완벽히 잃어버릴 수 있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이원욱 의원)라는 등 86그룹에 대한 비판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한 가운데, 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는 내년 총선에선 동일 지역구 3연임 제한을 요구하는 등 재차 세대 교체론이 불어닥칠 듯한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마침 이번 사태 직전 1988년생 초선 오영환 의원이 아래와 같은 말과 함께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죠.
“책임져야 할 사람이 기득권과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이 우리 정치에서 가장 먼저 개혁돼야 할 대상이다. 말만 앞세운 개혁에 무슨 힘이 있느냐고 국민들이 묻는다. 전 그 물음에 ‘내려놓음’이란 답을 드린다.”
지난 10년간 민주당 내 86 용퇴론이 늘 용두사미로 끝난 건 ‘기득권화’라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보여주기식 선거용 레퍼토리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썩은 부분을 제대로 도려내진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싸잡아 ‘다 나가라’는 무책임한 방식이다 보니 매번 정치적 이슈로만 소모되고, 결과적으로 쇄신은 안 됐던 겁니다.
86그룹은 이번에는 타의에 쫓기듯 밀려나기보다는 당의 중진답게 진정성 있는 쇄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겁니다. 자기들끼리 감싸고 엄호하기 전 우리 사회가 왜 유독 자신들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한 번 돌아볼 때입니다. 감동 없는 쇄신에 거듭 속아줄 유권자는 없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끈 정치드라마 ‘퀸메이커’에서 나온 대사로 칼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나쁜 X이 나쁜 짓 한 거랑, 좋은 X이 나쁜 짓 한 건 천지 차이야. 나에 대해 뭘 까발리든지 정의로운 코뿔소(주인공)가 서민 뒤통수 때린 건 이제 덮을 수가 없어. 그게 정치판 생리란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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