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윌리엄 영국 왕세자는 미 독립전쟁 투사의 후손"

강영진 기자 2023. 4. 2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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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다이애너 왕세자비 통해 미국 혈통 이어받아
6대조가 영국계 미국 이민…독립전쟁 민병대

[런던=AP/뉴시스]윌리엄 영국 왕세자의 조상이 미 독립전쟁 당시 영국에 맞서 싸운 전사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 2019년 2월 10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열린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 참석한 윌리엄 영국 왕세자와 캐서린 미들턴 왕세자빈. 2023.02.21.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을 앞두고 왕세자 윌리엄의 혈통 일부가 미 독립 전쟁 당시 영국에 맞서 싸운 미국인 혈통임이 처음 밝혀졌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가 23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기록에 따르면 윌리엄 왕세자는 1775년 미 독립 전쟁 초기 영국군에 맞서 싸운 베나자 스트롱의 후손이다. 윌리엄 왕세자는 모친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통해 혈통의 16분의 1을 스트롱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미 독립전쟁을 기념하는 신시내티 협회의 도서관 책임자 조셉 스톨츠는 “독립 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가 1860년 남북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적대 세력 사이에 관계가 밀접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그는 “윌리엄 왕세자의 조상이 영국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강조했다.

스트롱 가문은 1635년 영국에서 뉴잉글랜드(미국의 북동부 지역)로 이주했다. 윌리엄의 6대조인 베나자 스트롱은 1740년 코네티컷주 코벤트리에서 태어났으며 코네티컷 민병대 일병으로 복무했다.

1773년 보스턴 차사건 이후 영국은 뉴잉글랜드에 정규군을 파견해 소요를 진압하고 민병대 결성을 시도하는 반군을 색출했다. 1975년 영국군이 보스턴에서 렉싱턴과 콩코드로 진격해 민병대 물자를 압수하고 새뮤얼 애덤스와 존 핸콕 등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반군들도 스트롱 등을 긴급 모집해 결성한 “신속대응군”으로 강력히 저항했으며 스토롱은 렉싱턴 민병대 소속이었다. 당시 조지 3세 왕의 기대와 달리 영국군이 빠르게 승리하지 못하면서 미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윌리엄 왕세자의 또 다른 조상으로 스트롱의 조카인 네이선 헤일은 미 역사에큰 족적을 남겼다. 예일대 출신으로 전쟁 발발 당시 코네티컷주 뉴 런던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코네티컷 민병대를 거쳐 1776년 미 육군 최초의 정보부대로 알려진 놀턴 기습부대 일원이 됐다.

영국군이 맨해튼을 공격하려 하자 조지 워싱턴 장군이 정확한 공격 계획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던 때였다. 워싱턴 장군에 발탁된 헤일은 일자리를 잃은 네덜란드어 교사로 위장해 영국군이 점령한 롱아일랜드에 스파이로 침투했으나 예일대 졸업장을 지니고 있던 점이 빌미가 돼 체포됐다. 독립선언 두 달 뒤인 1776년 9월 22일 21살의 나이로 교수로 처형됐다. 그는 미군 최초의 처형 스파이다. 그가 남겼다는 마지막 말 “조국에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어서 유감”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미 의사당에 헤일의 동상이 들어서는 등 수많은 기념물이 만들어졌다. 헤일의 유해는 사라졌지만 그의 가족들이 묻힌 네이선 헤일 공동묘지에 첨탑이 만들어져 있다. 그의 작은 아버지 베나자의 무덤은 초라한 모습이며 묘비에 스토롱은 “구더기 밥(food for worm; 숨져서 묻힌 사람이라는 뜻)”으로 표시돼 있다.

스트롱의 아들 조셉 스트롱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내과 의사로 수술 지혈제 발명 특허를 가지고 있다. 스트롱 가문은 오하이오주 칠리코트에 정착했고 윌리엄의 현조부(4대 조상)인 프랭크 워크가 크게 성공하면서 영국 왕실과 관련을 맺게 됐다.

1891년 다섯 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유명한 말썽꾸러기였으며 15살이 되던 해 뉴욕으로 도망친 뒤 건조식품상으로 크게 성공했고 1874년 뉴욕증시에 상장했다.

19세기 미국 재벌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와 손잡고 말과 관련된 모든 물품을 취급하는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으며 1911년 사망 당시 재산이 수백 만 달러에 달했다. 워크의 딸이자 윌리엄 왕세자의 고조모인 프랜시스는 “패니 공주”로 불리는 뉴욕 사교계의 명사였다.

프랜시스가 1880년 제임스 부스비 버크 로치와 결혼할 당시 아버지는 로치가 딸의 상속 재산을 노린 영국 귀족이라며 격분했다.

패니의 증손녀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가 영국 왕실의 샌드링엄 저택에서 출생했다. 다이애나가 찰스 국왕과 결혼해 윌리엄 왕세자를 낳았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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