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 엄정화의 현모양처 DNA 시효만료 ‘눈 앞’ [김재동의 나무와 숲]

김재동 2023. 4. 2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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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 “살아있어서 참 좋네요. 살아있어서 느낄 수 있는 자유도, 허기도, 고단함도 다 좋은데 왜 이렇게 가슴에 뜨거운 돌덩이를 올려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요?”

외과 회식 후 귀가길. 로이(민우혁 분)의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라이딩을 즐기며 정숙(엄정화 분)은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눈물을 흘렸다.

23일 방송된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 (극본 정여랑, 연출 김대진·김정욱) 4회에서 차정숙은 자신도 이해못할 제 감정의 정체를 로이에게 물어보았다. 물론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푸념이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로이는 당황했다. 무슨 답을 할까 주저하는 동안 정숙이 “오늘 제 주책에 장단 맞춰 주셔서 고마워요.”라고 감사를 전해온다. “고마운 일까지는 아니고 라뽀라고 해두죠. 의사와 환자 간의 유대감?”정도로 맞장구쳐준 후에야 생각이 정리됐다.

로이는 “도대체 왜 그런 남자랑 살아요? 내가 보기엔 선생님 상당히 괜찮은 사람인데..” 로이의 어림짐작에 정숙이 질문한 가슴 속 뜨거운 돌덩이는 본인이 봐도 이해하기 힘든 남편 서인호(김병철 분) 때문인 듯 했다. 아내에게 간 떼주기를 망설인 찌질이, 제 평판에 흠 갈까 레지던트에 재도전한 아내의 용기를 외면한 모지리, 바로 그 서인호가 정숙의 가슴을 뜨겁게 짓누른다고 해석했다.

정숙의 답변은 로이로선 의외다. “우리 남편 정도면 최악은 아녜요.”라더니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녜요. 다 그렇게 살아요. 부부가 평생을 뜨겁게 사랑할 순 없잖아요.”라고 역성 들어준다. 로이는 불끈 화가 치솟는다. “뜨겁게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존중은 해야 하잖아요!”하고 보니 오버다. “주제 넘었어요, 미안해요.”라는 사과로 대화를 매조졌다.

그 날 정숙이 흘린 눈물의 정체는 무얼까? 음주로 달아오른 얼굴을 시원하게 어루만지며 스치는 밤바람도, 밤하늘에 오롯이 떠올라 고색창연한 빛을 내뿜는 달도, 그 주위를 오연하게 흘러가는 구름도, 다리 건너 흩뿌려진 별처럼 빛나는 불빛들도 아름다웠다. 그렇게 찬란한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대한 아쉬움? 아니면 그 시간 속을 무기력하게 몰락해온 스스로에 대한 회한?

간이식을 못받았다면 죽었다. 그러니 죽다 살아난 게 맞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특히 스스로가 달라 보였다. 살면서 차정숙은 수없이 날아와 쌓이는 독촉장들 속을 헤엄쳐야 했다. ‘며느리 차정숙 앞’, ‘아내 차정숙 앞’ ‘엄마 차정숙 앞’ ‘딸 차정숙 앞’.. 그 중에 수식없이 온전히 ‘차정숙 앞’으로 온 독촉장은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독촉장을 띄웠다.

“너도 꿈이 있었잖아. 기억해 내. 네가 뭘 하고 싶었는지. 기억했으면 그 꿈을 이뤄. 20년이나 밀렸잖아. 서두르라고!”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미련의 독촉장에 힘입어 오르지 못했던 사다리를 오르기로 했다.

이제 7첩 반상 차려 바치는 며느리 노릇은 아듀다. 제대로 먹지도 않는 아침상 차리는 마누라 노릇도 아디오스다. 다 큰 고3 딸래미 운전기사 노릇도 사요나라다. 그깟 등등은 그동안 연체없이 쳐내왔다. 그러니 이제는 20년이나 밀려온 독촉장이 먼저다. 죽다 살아나보니 낯설어진 심장이 “너 왜 그렇게 사니?” 다그치는 중이다. 내 속이 참을만큼 참았다고 다그치는데 남들의 평가 따위 쯤이야. 특히 출근한 정숙을 보고 달궈진 돌판 위 강아지처럼 우왕좌왕하는 서인호란 이름의 남편이란 작자 쯤이야.

회식자리서 과장 태식(박철민 분)이 물었다. “차 선생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서인호를 보니 절대 함구하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말했다. “죽었어요.” 죄없는 태식이 미안해하며 또 물었다. “언제 그렇게 됐어요?” 편하게 대답했다. “아주 그냥 한참 됐어요.” 또 물어온다. “가끔 생각 나시겠네요?” 이 질문은 정말 웃기다. “생각이 안 나요. 제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기억이 안 나요.” 대답 끝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끝내 참지 못했다.

로이에겐 “부부가 평생을 뜨겁게 사랑할 순 없다”고 변명했지만 한번 물어보자. 서인호를 뜨겁게 사랑한 차정숙이 있었던가? ‘뜨겁게’란 부사를 떼어내고 그저 사랑한 차정숙이라도 있기는 있었던가?

서인호에겐 서로 좋아했던 첫사랑 승희(명세빈 분)가 있었다. 그런 서인호? 정숙도 특별히 의식한 적 없었다. 그 날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으면, 그 날 마침 서인호가 부축담당이 아녔으면 20몇 년쯤 지난 후 가운 입고 만나 ‘어이!’ 알은 체 정도 하는 사이 아녔을까? 혹은 기억도 못해 “구산의대 95학번?” 하고 반가워나 하던가.

다만 청춘이 죄였을 뿐이다. 호르몬의 쿠데타에 속절없이 나가 떨어진 청춘이 죄다. 아무리 봐도 청춘은 젊은 이들에게 주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또 하나의 죄라면 뼈에 새겨진 현모양처의 DNA. 가족을 뿌리라 철썩같이 믿고, 희생과 헌신을 당연히 여기는 성격적 결함. 그런 차정숙이므로 하룻밤 호르몬의 시간을 보낸 후 정민(송지호 분)이 들어섬으로써 서인호와는 가족이 되어야 했다. 여기 어디 사랑이 있지? 게다가 이십 수년 살았단들 각 방 살이 10년을 훌쩍 넘겼으니 부부간 정을 새삼 들추기도 쉽지않다. 두 사람의 부부생활은 관성처럼 산다는 편이 적합해 보인다.

퇴원길 환자가 쓰러졌다. CPR 시행중에 인호와 승희의 스침이 정숙의 눈에 든다. 반가운 웃음, 애정 넘친 시선, 그리고 머리를 쓸어올리는 승희 손목의 팔찌.

남편 서인호 주머니에서 5백만원 넘는 팔찌 영수증을 발견했을 때 정숙은 영수증 넘버로 팔찌를 확인했었다. 남편은 두 달도 더 남은 정숙의 생일 선물로 미리 준비했다고 말했었다. 그 팔찌가 분명한데 왜 저 손목에? 순간 들리는 “샷‘소리에 정숙은 무의식중 환자의 가슴에 손을 댔고 이어 관통하는 심장제세동기의 200줄 전류. 정숙은 쓰러졌다.

차정숙이 깨어나면 또 한번의 각성을 이룰까? 남편 서인호의 불륜은 차정숙 몸 속 현모양처 DNA의 시효 만료를 선고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zaitung@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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