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브람스를 오랜 친구처럼 그윽히 전한 여든의 거장 [클래식 리뷰]
어느덧 여든 중반에 이른 노거장은 베토벤과 브람스를 오랜 친구들 대하듯 했다. 친구들의 익숙한 명작을 들려주는 그의 말투와 몸짓은 일견 무던한 듯하면서도 진지하고 세심했으며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애정과 열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세는 무게나 깊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윽한 풍미를 자아내는 연주로 이어졌다.
지난 22일 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의 ‘마스터즈 시리즈’ 올해 첫 공연이 진행되었다. ‘마스터즈 시리즈’는 KBS교향악단이 지난해 야심차게 출범시킨 기획연주회 시리즈로 국제무대에서 각광받는 메이저 아티스트들의 섭외와 해당 아티스트의 특장점을 부각하는 프로그램을 차별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막심 벤게로프, 안드레아스 오텐자머, 바딤 글루즈만 등 특급 솔리스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던 이 시리즈가 올해는 독일의 거장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의 무대로 문을 열었다.
1939년생으로 현재 독일 드레스덴 필하모닉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인 마렉 야노프스키는 ‘독일 정통파’ 지휘자로 명망 높다. 출생지는 폴란드 바르샤바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외가를 따라 독일로 이주하여 서독에서 성장했다.
젊은 시절 프라이부르크와 도르트문트에서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을 지냈고, 중년 이후에는 쾰른, 드레스덴, 베를린 등 독일음악의 주요 거점 도시들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긴 경력 동안 영국, 프랑스, 스위스, 미국에서도 활동했지만,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베토벤,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 등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에 있다.
특히 바그너 전문가로 명망이 높은데, 1980년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녹음한 ‘반지 사이클’ 음반(Eurodisc)으로 호평을 받았고, 2010년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녹음한 바그너 악극 시리즈(Pentatone)에 쏟아진 찬사는 대단했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특별히 개성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중하면서도 섬세하고 유연한 해석과 다분히 ‘전통 독일적인’ 사운드를 바탕으로 음악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있다.
이번 KBS교향악단과의 공연에서도 야노프스키의 선택은 독일 음악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2번’(1부)과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2부)을 나란히 편성했던 것.
서곡이나 협주곡 없이 교향곡 두 곡으로만 채운 프로그램은 근래 독일 메이저 교향악단들의 내한공연에서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던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지휘자의 해석과 악단의 역량에 집중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야노프스키는 예의 ‘독일 사운드’를 바탕으로 견실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1부 베토벤 교향곡의 서주는 사뭇 느린 템포로 출발했으며 이어지는 주부의 템포도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악센트도 강하지 않았다.
통상 질주하는 듯한 템포에 현란한 다이내믹을 구사하는 근래의 트렌드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지만, 그런 온건하고 보수적인 접근법도 나름의 장점과 미덕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특히 담담하게 이끌어간 흐름 속에서 악곡 내면에 깃들인 생기와 온기, 정서적 깊이를 은근하게 드러낸 2악장에서 그런 면이 잘 드러났다.
다만 1부에서는 지휘자의 유연하면서도 세밀한 지시에 악단이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던 듯, 군데군데 다소 껄끄러운 앙상블이나 충분히 원활하지 못한 흐름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2부 브람스로 넘어가자 양상은 사뭇 달라졌다. 1악장 초입을 지나는 동안 악단은 지휘자의 지시에 완전히 적응했고 이후에는 마치 ‘독일 악단’같은 사운드와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비로소 온전히 구현되기 시작한 ‘야노프스키의 음악’은 중후하면서도 유려하고 투명했다.
두터운 현악을 우위에 두고 관악을 거기에 통합한 전형적인 독일식 밸런스를 취하면서도 저현부의 중량감을 강조하지 않았기에 사운드가 둔중하지 않았고, 분명하고도 유연한 프레이징 덕에 악곡의 골격과 텍스처가 동시에 효과적으로 조형되었다.
모든 악장의 연주가 수려했지만, 쾌조의 열띤 흐름 속에서도 섣불리 들뜨거나 지나치게 요동치지 않고 전편에 흐름에 걸맞은 클라이맥스를 매끄럽게 도출해낸 피날레는 유독 돋보였다. 그야말로 대가다운 노련한 솜씨요 심오한 음악이었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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