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지만 감미로운 ‘붓 터치’… 한국인 정서까지 ‘터치’
회화·판화 등 160여점 선보여
생애 여정 따라 7개 섹션 구성
현대인 내면 깊이 들여다보며
특별한 위로 건네는 미적 쾌감
히치콕 영화·소설 등에 영감줘
예상대로였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전시가 개막한 지난 20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앞마당은 관람객의 입장 대기 줄이 길게 섰다. 미술관 측은 “예매 열기가 뜨겁다”라고 했다. 지난 2019년 관객 30만 명이 몰린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전의 인기를 넘어설지 주목된다.
호퍼는 호크니와 함께 ‘호 씨(氏) 가문 사람’이라는 농담이 나올 만큼 한국 미술 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배우 공유와 공효진이 등장하는 한 온라인쇼핑몰 광고도 호퍼의 작품 이미지들을 재현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그의 국내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함께 연 이번 전시는 ‘에드워드 호퍼-길 위에서’라는 제목으로 회화·드로잉·판화 등 160여 점을 선보인다. 아카이브 자료 110여 점과 관련 영상도 볼 수 있다. 파리·뉴욕·뉴잉글랜드·케이프코드 등 호퍼의 생애 여정을 따라 7개 섹션으로 구성했다.
미술관 측이 안내하는 동선을 따르되 다음 몇 가지 점에 주목하면 전시를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선, 20세기 미국 ‘국민 작가’의 그림이 21세기 세계인들에게 더 사랑을 받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도시에서 일상을 보내는 현대인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번에 드로잉으로 선보이는 그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은 도시인의 고독과 소외를 다루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고립감을 절실히 느낀 사람들은 그림에 담긴 쓸쓸하면서도 감미로운 정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관람 포인트는 호퍼가 현대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풍경화를 통해 특별한 위로를 건넨다는 것이다. 일몰의 장관을 담은 ‘철길의 석양’에서 보듯 실제 풍경에 심상(心象)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얼핏 범상해 보이는 건물의 정경도 그의 붓끝에서 빛의 효과를 누리며, 보는 이로 하여금 미적 쾌감을 맛보게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휘트니미술관에서 빌려서 백악관에 걸었던 ‘벌리 콥의 집, 사우스트루로’ 등이 그렇다.
호퍼는 ‘미국적인 풍경’을 그림에 담아 당대 주류였던 유럽미술의 아류를 벗어난 독자적 화풍을 이뤄냈다.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 유학 후 그렸던 그림들이 인정을 받지 못한 탓에 그가 미국 미술의 정체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광대·매춘부·노동자·예술가들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푸른 시절’ 등 파리 시절 그림들과 이후 작품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점이다.
호퍼의 그림은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다.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시점으로 관음 욕구를 충족하거나, 누아르 필름처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앨프리드 히치콕 등의 감독들은 영화 미장센에 호퍼의 그림을 차용했고 많은 소설가들도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소설 ‘빛 혹은 그림자’는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그의 그림 여백을 통해 나만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은 관람법이다.
호퍼는 화가로 인정받기 전 밥벌이를 위해 잡지와 광고물 삽화를 그렸는데, 그게 도시인의 일상을 관찰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 삽화들을 보면, 세상에 무용한 경험은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8월 20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유료 관람으로 예매는 인터파크와 카카오를 통해 할 수 있다.
아내이자 동료 작가… 조세핀 코너 따로 마련
에드워드 호퍼의 개인전에서 한 코너로 ‘조세핀 호퍼’가 자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호퍼의 성공 뒤에 있었던 아내 조세핀(1883∼1968)의 존재를 뚜렷이 되새겨보게 하기 때문이다.
호퍼는 나이 마흔에 이르기까지 화가로서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잡지 삽화가로 호구했다. 뉴욕예술학교 동창생인 조세핀을 우연히 다시 만나 격려를 받고 수채화를 미술관에 출품한 것을 계기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 호퍼의 수채화들을 볼 수 있는데, 역시 수채화에 능했던 조세핀 덕분에 호퍼의 그림 색감이 다채로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료 작가에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성격 차이로 자주 싸웠다고 한다. 호퍼는 커다란 체구에 과묵한 편이었고, 조세핀은 작은 키에 말이 많았다. 그런 차이에도 두 사람은 호퍼가 84세로 타계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조세핀은 남편의 작업에 대해 일일이 기록하는 한편 작품을 화랑과 언론에 홍보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
무엇보다 조세핀은 호퍼의 뮤즈였다. 극단에서 활동한 경력을 살려 다양한 포즈를 남편에게 제안했다. 말년의 걸작 ‘햇빛 속의 여인’(1961)은 조세핀이 나체로 모델을 서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작품이다.
호퍼와 조세핀의 삶과 예술을 보면, 우리 미술사의 김기창-박래현 부부가 절로 생각난다. 박래현은 신체 장애가 있었던 김기창을 뒷바라지하는 데 힘쓰는 한편 자신의 작업도 꾸준히 했다. 박래현이 근년에 작가로서 조명을 크게 받는 것을 생각하면 조세핀 보다 낫다고 할까.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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