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돌…‘묻지마 한미일 동맹’으론 평화 못 꾸린다

한겨레 2023. 4. 2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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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2018년 평화프로세스 좌초 뒤 최장기 ‘대화제로’
윤 정부, 한미일 동맹만 전념…북, 핵무장 내달려
한반도 종전평화 캠페인 소속 회원들이 임진각에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통일의병 제공

4월15일 인천공항. 4월26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 준비차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의 도감청 논란과 대해 한미 양국이 동맹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라인 실세인 김 차장은 워싱턴에선 정보 분야를 포함한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북한의 핵 고도화, 미중 전략 경쟁의 격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안보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70년을 맞이한 한미동맹을 더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분위기이다.

다음날인 4월16일 임진각.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소속 회원들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머금고 있는 임진각은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회원들은 한반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또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며 세계 시민들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자고 호소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이 캠페인은 정전협정 체결 70년이 되는 7월27일까지 100만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렇듯 윤석열 정부와 시민사회의 엇갈림은 크다. 대미·대일 관계에 다걸기를 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불법적 행태까지 덮고는 한미일 삼각동맹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반면 시민사회는 묻지마식 한미일 삼각동맹 추구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와 맞물려 정전체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전쟁 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엇갈림은 역사의 시계와 조우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멈추기로 한 정전협정은 오는 7월27일에 70년째를 맞이하게 된다. 또 10월1일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이다. 그런데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이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휴전 협상 당시 북진통일을 국시로 내세운 이승만 정권은 정전협정을 한사코 반대했었다. 반면 조속한 휴전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정전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했었다. 결국 한미는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맞교환하기로 했다.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문제의 양대 축으로 기능해온 정전체제와 한미동맹은 한국전쟁이 낳은 ‘역사의 쌍생아’인 셈이다.

태생적으로 정전체제와 한미동맹은 상호의존적이다. 그런데 정전협정 60항에는 “3개월 내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정치회담을 소집하도록 건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을 통해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장치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평화체제와 한미동맹은 고도의 긴장 관계를 잉태하고 만다. 한미동맹과 그 물리적인 핵심인 주한미군의 핵심적인 역할은 정전체제의 유지·관리에 있다. 이는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면 한미동맹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구조적 긴장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의 한반도 탈냉전 프로세스는 미국의 주한미군 3단계 감축 계획 및 작전통제권 전환 논의와 궤를 같이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의 감축이 아니라 오히려 증강이 필요하다고 여긴 미국 강경파들의 방해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한미동맹의 유연화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2000년 6월에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 나선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키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도 북미관계 정상화에 시동을 걸었다. 북미는 그해 가을에 특사를 교환하면서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11월에 미국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나면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대북 협상을 중단하고 북한 위협을 빌미로 삼아 미사일방어체제(MD)를 선언했다. 심지어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자 선제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맞서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본격 나섰다.

공교롭게도 부시 행정부를 거치면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과 한미동맹,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 사이의 ‘삼각관계’가 수면위로 부상했다. 평화체제는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남북·북미 적대관계를 평화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북한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한미동맹과의 긴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평화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결국 6자회담에선 평화체제 문제를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별도의 포럼”에서 다루기로 했다. 하지만 2007년 한국 대선 결과로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면서 평화체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한미동맹 강화론이 맹위를 떨쳤다.

그 후 10년 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평화체제가 다시 부상한 시점은 2018년이었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체제와 관계개선, 그리고 비핵화를 동시적·병렬적으로 추진키로 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주류는 자신들의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를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의 실체는 “언젠가 주한미군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던 트럼프가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가 가시화되면 미군 철수를 명령하지 않을까 하는 데에 있었다. 두려움을 달래고자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은 종전선언을 무산시키는 등 북미협상을 훼방놓는 데에 바빴고 의회는 국방수권법을 통해 주한미군을 2만8500명 이하로 줄이지 못하도록 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미국 주류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해준 순간이었다.

2019년 들어 ‘톱다운’ 방식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되면서 그 이전과 이후의 한반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30년 가까이 핵개발을 ‘수단’으로 삼아 평화체제와 북미수교, 그리고 제재 해결을 추구했던 북한은 남북·북미정상회담이 황망한 결과만 낳았다고 판단하곤 핵무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말한 “새로운 길”은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갱생으로, 외교는 중국과 러시아 중심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임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노선은 한미의 대북정책 수단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핵화를 최고의 대북정책 목표로 삼아온 한미는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해줄 수 있는 평화체제,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을 해결해줄 수 있는 제재 해결과 경제협력,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한미일과의 관계 개선을 비핵화의 상응조치로 삼아왔다. 하지만 2019년을 거치면서 핵무기를 “국체(國體)”로 삼기로 한 북한에선 더 이상 평화체제, 제재 해결, 관계개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사실상 관심을 껐다는 뜻이다.

미국 워싱턴 방문을 마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15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입국한 뒤 취재진을 만나 질문을 듣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그 결과가 바로 ‘대화 제로’ 시대이다. 남북한의 공식적인 대화는 2018년 12월 이후 지금까지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다. 1971년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래 최장기간이다. 북미대화 역시 2019년 10월 실무회담 이후 굳게 문이 닫혀 있다. 이 역시 1990년 이래 최장기간이다. 한미가 대화를 제의해도 북한이 일체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화가 사라진 한반도에선 한미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에선 찬양의 대상으로, 한반도의 북쪽에선 규탄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군사협력 추진 이외에는 우리의 안보를 지킬 수 있는 어떠한 대안도 없는 것처럼 여기에 다걸기를 하고 있다. 고희를 맞이한 한미동맹을 기념하고 강화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나머지, ‘일흔 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재탄생시키는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정치적 양극화와 기능 부전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국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반해 미국 의회 일각에선 ‘한반도 평화 법안’ 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당의 브래드 셔먼 하원의원이 19명의 의원들과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은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우선 2021년에 법안 발의자는 민주당 소속 3명이었던 반면에 이번에는 앤디 빅스 공화당 의원을 비롯한 20명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또 이전 법안에는 없었던 주한미군 관련 조항도 포함되었다. 미국 행정부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외교적 관여를 촉구하면서도 “이 법안의 어떠한 내용도 한국 및 다른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명기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 의회의 움직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화체제와 한미동맹의 공존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두 가지 70년을 맞이한 한국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예고된 길은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삼각동맹 추구가 북한의 핵 고도화와 만나면서 한반도 정전체제의 불안이 가중되는 것이다. 한반도 정전체제의 불안이 국제적인 신냉전 구도와 맞물리면서 우리에게 가해지는 위험의 크기가 더욱 커질 우려도 있다. 냉전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이 분단·전쟁·정전체제의 근원으로 작용했던 것처럼, 신냉전의 날카로운 칼날이 한반도 정전체제를 향해 뻗쳐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시사하자 러시아가 북한에 최신 무기 제공 가능성으로 맞불을 놓은 것은 예고편에 해당된다.

그럼 다른 길은 없을까? 기실 평화체제와 한미동맹 사이의 구조적인 긴장을 딛고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기에는 진보 정권보다 보수 정권이 훨씬 유리하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평화협정을 입에 올릴 때마다 보수 진영으로부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무너뜨리려 하느냐’는 색깔론에 시달렸었다. 이에 반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평화협정 협상을 제안한다고 해서 색깔론에 시달일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초당적인 협력과 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또 북한에도 다른 길을 비춰주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다. 우리도 이제 보수가 주도하고 중도와 진보가 지지·협력하는 진짜 안보를 향한 여정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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