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피해 뒤섞인 ‘맞학폭’ 늘어나는데…엄벌로 대처 가능할까
[학교폭력]
지난 2017년 서울 지역의 한 초등학교 5학년 ㄱ은 하굣길에 반 친구 ㄴ을 놀리다 ㄴ이 던진 보온병에 뒤통수를 맞았다. ㄱ은 응급실에 가 봉합 수술을 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학교는 이 사건을 인지하고 학교장 직권으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 접수했다. 그런데 ㄴ의 부모는 “ㄱ이 평소 지속해서 ㄴ을 괴롭혔다”며 피해 학생 ㄱ을 가해 학생으로 지목해 ‘맞학폭’으로 신고했다. 결국 ㄱ은 서면 사과와 접촉·협박·보복행위 금지 조처를, ㄴ은 서면 사과와 교내봉사 조처를 받았다. 이에 불복한 ㄱ의 부모는 ‘피해자인 ㄱ에게 징계 처분을 하는 건 부당하다’며 학교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피해와 가해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맞학폭’ 사건이 학교 울타리를 넘어 법정까지 간 것이다.
정부가 지난 12일 발표한 ‘학폭 근절 종합대책’(학폭 대책)에 대한 학교 현장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접촉한 학폭 전담 교사와 학생부장 등 학생 생활지도를 담당한 적이 있는 교사들은 학폭 사례가 ‘정순신 사태’나 ‘더 글로리’와 달리 “가해와 피해를 무 자르듯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다수”라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라며 학폭 신고를 했다가 조사 과정에서 가해 행위가 확인돼 신고를 철회하는 일도 적잖다. 지난 3월 서울의 한 중학교 1학년 ㄷ은 같은 학급 ㄹ이 본인을 때려 넘어뜨렸다며 ㄹ을 학폭으로 신고했다. 그러나 학교 자체 조사 결과 일상적 괴롭힘의 가해자는 ㄷ이었다. ㄹ이 수차례 “놀리지 말라”, “내 몸을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ㄷ의 괴롭힘이 지속했다는 것이다. ㄷ의 학부모는 결국 신고를 철회했다.
5년간 학생부장 경험이 있는 이형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어떤 사안에서는 피해자인 학생이 다른 사안에선 가해자이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며 “학교 현장에서는 엄격하게 가·피해 학생을 규정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실제 김세원 가톨릭관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2018년 한국아동청소년패널 조사 응답자 1881명을 분석한 결과, 가해 및 피해 경험이 모두 있는 ‘중복경험 학생'이 8.1%에 이르렀다. 가해 경험만 있는 학생(13.4%)이나 피해 경험만 있는 학생(12.3%)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학생부장 경험이 있는 한성준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는 “신체폭력은 줄고 언어폭력, 관계적 폭력이 늘면서 가·피해가 모호하게 섞이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학폭위 심의 통계인 ‘연도별 학폭 유형’ 자료를 보면, 언어폭력은 2013년 5.5%에서 2022년(1학기 기준) 26.6%로 5배 늘었다. 같은 기간 신체폭력은 66.9%에서 35.7%로 비중이 크게 줄었다.
가해 학생 쪽이 보복성·무마성으로 ‘맞신고’를 이용하는 경우도 나온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학폭전담교사를 맡은 조아무개 교사는 “피해 학생이 과거 한 번이라도 욕을 하거나 신체적 폭력을 쓴 일을 가해 학생이 최대한 기억해내서 맞신고를 하는 식”이라며 “맞신고가 진짜 학폭인 경우도 있지만 보복성·무마성으로 이뤄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가해 학생 엄벌’과 ‘피해 학생 보호’라는 정부의 이분법적 학폭 근절 대책이 효과를 내기 어려운 경우가 적잖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성준 공동대표는 “교육부가 내놓은 대책은 가해 학생을 명확하게 분리해내서 합당한 벌을 주겠다는 것”이라며 “가·피해를 엄밀하게 구분 짓기 힘든 사안이 더 많은 학교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대책”이라고 짚었다. 학폭전담교사 조아무개씨도 “가해 학생 엄벌주의는 일방적·신체적 폭력이 많았던 시대에나 통할 대책”이라며 “이제는 언어폭력, 사이버 폭력 등 일상적 학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에 대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피해 학생 대책으로 내놓은 ‘분리 요청권’에 대해 학교 현장에서 회의론이 이는 것도 맞학폭 때문이다. 지난 19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발간하는 <교육희망>이 초·중·고교 생활교육부장 및 학폭담당교사 43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교사의 75.8%는 “피해 학생이 즉시 분리를 요구하는 경우 상대 학생 역시 피해를 주장하며 학폭 신고를 한 뒤 분리 조치를 요구하는 ‘쌍방 학폭 신고’가 증가할 것”이라며 ‘분리 요청권’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전문가들은 학교가 학폭을 교육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부장을 맡은 최민재 전국중등교사노조 위원장은 “맞학폭 등 화해·조정할 수 있는 사안의 경우 기계적으로 전담기구나 학폭위로 갈 게 아니라 학폭전담교사, 가·피해 학생, 학부모 등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일선 교사한테 재량권이 주어져야 한다. 학교 관계회복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고 학교 밖 갈등중재 전문가와 학교를 연결하는 것도 방안으로 꼽힌다.
분쟁조정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재영 한국회복적정의협회 대표는 “학교 현장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환되기도 하는데 가해자로만 취급하면 억울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며 “분쟁조정 기구를 만들어 이곳에서 가·피해의 정도를 밝히고 각자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해야 할 조치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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