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주식거래 혁명’ 이끈 시각장애인... 전재산 기부하고 떠나다

박건형 테크부장 2023. 4. 2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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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2023)프로그래머 버니 뉴컴 별세
1982년 이트레이드 창업
PC·스마트폰 주식 거래 혁명 이끌어
이트레이드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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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주식을 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의 거래소에 상장된 해외 주식을 24시간 사고 팔 수도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라는 책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는 무려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회사가 생기고, 이 회사에 투자자들이 몰립니다. 초대 주주는 1143명, 자본금은 오늘날의 가치로 1억유로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이 당시 동인도회사는 21년간의 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했는데 장기 투자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지분을 팔 수 있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증권거래의 시초라는 겁니다. 이후 지분거래만으로 돈을 버는 트레이더들이 생겼고 세계 곳곳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시스템이 구축됐습니다. 회사의 장부에만 기록되던 주식 거래는 전화와 전표, 증권회사 객장으로 점차 발전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주식의 세계로 끌어 들였습니다.

오레건주립대 행사에서의 버니 뉴컴(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 /오레건주립대

오늘날 주식거래를 하기 위해 거래소에 가거나 증권사를 찾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일까요? 바로 PC와 스마트폰을 통해 어디서나 원하는 시점에 주식을 사고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식거래의 혁명을 이끈 온라인 주식거래의 발명자 버니 앨런 뉴컴(Bernie Newcomb)이 지난 1월29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혁명적인 기술을 만들어낸 뉴컴의 인생은 테크 업계에서 꽤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자 독학으로 소프트웨어를 공부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잡스와 워즈니악 같은 만남

1980년 전자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포터는 캘리포니아 팰로알토의 핼러윈 파티에서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뉴컴을 만났습니다. 당시 애플의 ‘애플II’ 컴퓨터를 막 구매한 포터는 이 개인용 컴퓨터로 집에서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얘기합니다. 워싱턴포스트는 두 사람의 만남을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만남에 비유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잡스와 마찬가지로 포터는 선견지명이 있는 마케터이자 계산적인 사업가였고, 뉴컴은 워즈니악 같은 천재 프로그래머였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온라인 주식 거래를 구현한 애플 컴퓨터 /컴퓨터박물관

이들은 자본금 1만5000달러로 ‘트레이드 플러스’라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처음 타깃은 이른바 ‘디스카운트 브로커(discount broker)’였습니다. 증권사보다 훨씬 싼 가격에 주식 거래를 대행하거나 자산을 운용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온라인으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죠. 트레이드 플러스를 통해 처음 주식 거래를 한 사람은 미시간의 한 치과의사였다고 합니다. 당시 온라인 주식 거래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PC통신 시절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의 속도와 전화가 왔을 때의 상황이 한시가 급한 주식 거래에서 나타난다면 환장할 노릇이겠죠.

하지만 거래소나 증권사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편의성 덕분에 중개인들은 자체적으로 온라인 거래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시장이 사라진 포터와 뉴컴은 1992년 회사 이름을 ‘이트레이드(E-Trade)’로 바꾸고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직접 주식 거래 서비스를 론칭합니다.

◇PC시장 성장 이끈 혁명적 기술

1992년 85만달러였던 이트레이드의 매출은 2년만에 1100만달러로 늘었고 비즈니스저널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트레이드의 목표는 피델리티, 찰스 슈왑 같은 주식 중개 업계의 최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업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얘기였지만, 결국 이 꿈은 이뤄졌습니다.

이트레이드는 주식 거래당 12달러를 고객에게 받았는데, 당시 일반적인 주식 거래 수수료의 절반 이하였다고 합니다. 공격적인 영업도 했습니다. 1996년 주요 일간지에 “여러분의 주식 중개인은 이제 구식입니다(Your broker is now obsolete)”라는 광고를 게재했습니다. 다음 광고의 카피는 “주식 중개인을 부팅하십시오(Boot your broker)”였습니다. 인터넷 속도와 PC 성능이 향상되면서 이트레이드는 급성장을 거듭했습니다.

1996년 이트레이드는 주당 10.5달러에 뉴욕 증시에 상장됐고, 1년 후에는 주가가 두 배가 됐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트레이드는 PC 판매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고, 아마추어 주식 투자자들을 전문 투자자로 바꿔놓았다”고 했습니다. 이트레이드의 최고기술경영자이자 연구개발 총괄을 맡았던 뉴컴은 주당 가격이 약 23달러였던 1997년 회사 주식 240만주를 가지고 은퇴했습니다. 본인의 역할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물러날 때를 선택한 겁니다.

◇벌목공이 될 뻔한 시각장애 소년

이트레이드의 탄생을 알린 뉴욕타임스 1984년 3월29일자 기사 /뉴욕타임스 타임스머신

뉴컴은 1943년 11월10일 포틀랜드 남쪽의 작은 마을 스키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벌목을 주업으로 하는데 인구 1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아버지는 학교 청소 직원과 골프장 관리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점 점원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가족들은 그를 빙(Bing)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지역 제재소나 벌목장에서 일할 운명이었다”고 했습니다.

뉴컴은 선천성 백내장으로 법적으로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아예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완전히 눈에 가까이 대야 간신히 글자가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청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뉴컴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2학년까지 시각장애인 기숙 학교에 다녔지만 공립학교로 옮겨 비장애인들과 어울렸습니다. 점자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오레거니언 뉴스페이퍼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일찍 배웠다”면서 “미식축구팀 입단 테스트를 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학생 매니저이나 워터보이를 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극적이었던 인생

뉴컴은 가족 가운데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오레건주립대 경영대 재학 시절 줄곧 장학생이었고, 3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을 했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첫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을 고용하는 회사가 거의 없었던 것이죠. 은행과 회계법인 채용 시험마다 낙방했고, 대학 진로상담관이 한포드워크스 공장의 데이터 처리 부서에 간신히 일자리를 구해줬습니다.

온라인 주식거래의 발명자 버니 뉴컴 /오레건주립대

뉴컴은 소프트웨어를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대학에서 메인 프레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청강했고, 공장을 퇴사한 뒤에는 소프트웨어 관련 컨설팅 서비스를 기업들에 제공했습니다. 그러다 포터를 만난 것이죠. 제약이 많은 시각장애인이었지만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수상스키와 스키를 즐겼고, 북극을 비롯한 전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여행 중에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를 다치는 일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벌였습니다.

뉴컴의 인생은 끝까지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은퇴 직후 버니 뉴컴 재단을 세워 전 재산의 사회환원에 나섰습니다. 은퇴한 1997년 오레곤주립대에 610만달러를 기부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 대학이 기부 받은 최고 금액입니다. 2000년에는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축구장과 육상장을 지으라며 130만달러를 내놓았습니다. 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대(UCSF) 안과의 올 메이 시 재단의 연구를 지원했고, ‘버니 앤드 게리 뉴컴 안과 혁신 센터’ 건립자금도 냈습니다. 미국 시각장애인 재단은 그에게 ‘헬렌 켈러 공로상’을 줬죠. 자신이 처했던 현실에 뉴컴이 비관하고 멈췄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온라인 주식거래도 한참 뒤에야 현실에 등장했겠죠.

동업자인 포터는 2015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업자들이 물러난 이트레이드는 어떻게 됐을까요. 2020년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가 130억달러에 인수했습니다. 당시 이트레이드의 고객은 520만명 수준이었습니다. 파티장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낸 거대한 성공인 셈이죠.

※참조

워싱턴포스트 : https://www.washingtonpost.com/obituaries/2023/04/12/bernie-newcomb-who-created-etrade-and-distrupted-online-trading-dies-at-79/

뉴욕타임스 : https://www.nytimes.com/2023/04/04/business/dealbook/bing-newcomb-dead.html

월스트리트저널 : https://www.wsj.com/articles/bernard-newcomb-blind-software-engineer-helped-launch-e-trade-92a5c523

위키피디아 : https://en.wikipedia.org/wiki/Bernard_A._Newcomb

오레건주립대 : https://fororegonstate.org/stay-informed/impact-stories/detail/remembering-Bernie-Newc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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