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청 의혹이 던진 질문 ‘한·미 동맹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이든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향후 어떻게 조치할지, 그 경로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국 정부 도감청 의혹도 마찬가지다. 4월8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미국 정보 당국이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을 도감청한 문건 100여 쪽이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지난 3월 초 미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요청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등이다. 3월 말 연이어 사임한 이문희 당시 외교비서관과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의 대화가 상세히 담겼다. 사실이라면, 패를 다 들키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셈이다. 주권 침해 사안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을 보자. 4월9일 대통령실의 첫 입장은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보겠다”였다. 조심스러운 태도다. 논란이 커지자 4월10일 대통령실은 “미국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라고 추가로 밝혔다. 또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과장하거나 왜곡해 동맹을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많은 국민에게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도감청 의혹의 진원지인 미국이 아닌, 국내 비판 여론을 겨냥한 메시지였다.
4월11일에는 ‘미국 정부의 도감청 의혹 관련 대통령실 공식 입장’이라며 “양국(한·미)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라고 밝혔다. 야당이 제기한 대통령실 보안 문제에는 강경히 대응했다.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 운용 중”이고 “더불어민주당은 허위 네거티브 의혹을 제기해 국민 선동하기에 급급”해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핵 위협 속에서 한·미 동맹을 흔드는 ‘자해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절정은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발언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일정 협의차 4월11일 미국으로 출국하는 길에 기자들과 만난 그는 ‘미국 측에 우리의 어떤 입장을 전달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할 게 없다”라고 답했다. “왜냐하면 누군가 위조한 것이니까”라는 것이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이 문제는 많은 부분에 제3자가 개입돼 있으며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의도에 따라 도감청을 양해할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반면 미국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프랑스, 이스라엘 등을 대상으로 도청을 했다는 문건이 나왔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한 전황은 수많은 인명이 달린 예민한 이슈다. 대응해야 할 범위가 광범위하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의 주요 당국자들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4월11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일을 했고, 앞으로 그런 일들을 해나갈 것이다(4월12일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사실상 도감청을 시인하는 말이다. 4월12일 〈뉴욕타임스〉는 쐐기를 박았다. “관계자에 따르면 적어도 문건 대부분은 진짜고, 일부 조작됐다는 문건도 처음에 (원본 그대로) 업로드된 다음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을 자아낸다. 한국 정부의 대처가 적절했느냐는 것이다. 미국이 수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서둘러 괜찮다고 먼저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맞았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여당에서도 “사과 요구해야”
여당 내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온다.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하는 유승민 전 의원만이 아니라, 안철수·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4월12일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윤상현 의원은 박진 외교부 장관을 향해 정부의 대응이 성급하다고 지적했다. “만약 이게(미국의 도감청 의혹) 진짜라면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지 않나. 그게 대한민국 국격에 맞는 글로벌 중추국가다. (한·미가) 주종관계 동맹이 아닌 대등한 동맹으로 가야 한다.”
외교가의 평가도 비슷하다. 전직 외교부 관계자는 “도감청이 국제정치 무대의 뒷면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같은 일은 맞다. 그런데 이렇게 도감청 의혹이 드러난 상황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맞지 않다. 짚을 건 짚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외교관은 핵심은 도감청 여부라고 꼬집었다. “문건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냐에 앞서서, 도감청이 있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논점을 흐리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와 이스라엘도 해당 문건 내용이 가짜라고 했다며 정부·여당 관계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데, 두 나라는 모두 공식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만큼 예민한 내용이 문건에 담겨 있다. 프랑스는 자국군이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내용이고, 이스라엘은 자국 대외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국내 시위에 간섭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이라도 그걸 어떻게 인정하나?”
과거 다른 나라 사례와도 비교된다. ‘미국발 도청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이 한국 포함 38개국 미국 주재 대사관 등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일·프랑스·멕시코·브라질 등은 미국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개인 휴대전화를 도청당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 국빈 방문을 취소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도청 사건에 유야무야 대처했다. 공식 항의조차 못했다.
현재 윤석열 정부는 4월26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이해 치러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악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미국의 도감청 의혹에 대한 공식 사과 요구나 협상의 지렛대 활용도 불가하다고 본다. 이러한 행동이 곧 한·미 관계의 신뢰를 흔든다는 판단이다. 오히려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한·미 동맹을 훼손한다는 논리다. 미국보다는 국내 비판 여론과 각을 세우고 있다.
외교안보 전문가인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는 전략적으로도 영리하지 못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양면 게임(Two Level Game) 이론’에 따르면, 국제정치 협상에서 국내의 반대 여론은 오히려 협상력을 높여준다. 1974년 당시 포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8만여 명이 반미 시위를 벌였다. 일본 정부는 일부러 그 앞으로 포드의 차를 지나가게 하고는 ‘이러한 반대 여론을 뚫고 내가 당신을 만났으니 더 양보해달라’는 식으로 전략을 짰다. 국내 반대 여론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는 국내 비판 여론을 공격하며, 심지어 미국은 ‘악의가 없었다’는 식으로 넘어가려 한다.”
“국내 반대 여론은 국제 협상력 높여”
좀 더 본질적으로 이번 사건을 ‘리뷰’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윤석열 정부가 동맹의 의미와 국제정치의 현실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국가정보학회장을 지낸 김유은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동맹은 신뢰 관계를 계속 쌓아나가면서 서로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때 굳건해진다.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은 동맹은 양국 국민 모두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한 전직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정치의 ‘기본’을 인식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 경험이 적은 윤 대통령이 냉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깨닫는 수업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친미의 깃발로만 나라를 끌고 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내부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게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그러한 기본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세상이 ‘친미’와 ‘반미’로만 나뉘지 않는다. 도감청 사건을 지금처럼 대응하는 것은, 이번 사안을 너무 값싸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심지어 한국은 미국의 유일한 동맹국이 아니다.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 미국인 것과는 비견된다. 미국은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 미국의 도감청 의혹으로 다시금 주목받는 미국 중심의 정보 공유 네트워크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Alliance,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가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이 동맹국에 부여하는 전략적 이해관계의 우선순위를 가늠해볼 수 있다.
BBC 보도에 따르면, 스노든의 폭로로 파이브 아이즈만이 아니라 나인 아이즈(The Nine Eyes Alliance, 파이브 아이즈+덴마크·프랑스·네덜란드·노르웨이), 포틴 아이즈(The 14 Eyes Alliance , 나인 아이즈+벨기에·독일·이탈리아·스페인·스웨덴)도 공개됐다. 이번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파이브 아이즈에 속하는 캐나다조차 도감청을 했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윤석열 정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한·미 동맹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동맹인가?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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