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141억마리 떼죽음…꿀 다 떨어진 4월
“이건 기후변화 따른 자연재해, 생태계 위기”
“겨울 동안 키우던 벌의 절반을 잃었어요. 작년 월동 들어갈 때는 벌통이 500개가 넘었는데, 지금은 시원찮은 것들까지 합쳐도 300개나 되려나? 제가 명색이 양봉 가르치는 사람인데, 어디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합니다.”
지난 23일 경남 창원시 대암산 기슭에서 만난 승장권 한국양봉진흥원장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양봉장 한 구석에는 빈 벌통이 쌓여있었다. 어림잡아 60개는 넘어보였다.
꿀벌은 봄꽃이 피는 4월 초부터 5월 중순 사이에 1년에 할 일을 다 한다. 이때는 쉼 없이 이꽃 저꽃 다니며 꿀을 빨아와 벌통 안 벌집틀을 빈칸 없이 채운다. 양봉업자들은 꿀이 틀 안에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가, 4월말부터 꿀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벌들이 한참 꿀을 채울 시기에 빈 벌통이 쌓여있다는 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다.
꿀벌이 살고 있는 벌통의 상태도 심각했다. 벌통 하나에는 벌집틀 8장이 들어가는데, 벌집틀이 2~3장뿐인 벌통이 수두룩했다. 꿀벌 숫자가 적어서 벌집틀을 더 들이지 못한 것이다.
승 원장은 “올해는 아무래도 꿀 뜨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지금처럼 벌통이 차지 않은 상태에서는 꿀을 짜는 것보다 꿀벌 숫자를 늘리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승 원장은 “날이 따뜻해지면서 벌이 불어나고는 있지만, 개체수가 워낙 적어 속도가 안 붙는다. 벌을 살 수만 있으면 웃돈을 주고라도 사고 싶은데, 모든 양봉농가가 피해를 본 상황이라 지금은 벌을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했다.
벌들이 부족한 건 2년 연속 발생한 떼죽음 때문이다. 한국양봉협회는 4월 현재 협회 소속 농가의 벌통 153만7270개 중 61.4%인 94만4000개에서 꿀벌이 폐사한 것으로 집계했다. 벌통 하나에 1만5000~2만 마리의 벌이 살고 있는 만큼, 최소 141억6000만 마리가 넘는 꿀벌이 사라진 셈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전국 피해 상황을 조사 중인데, 지난해보다 피해규모가 클 것 같다”고 말했다.
꿀벌 집단 폐사의 주범으로 관계당국이 지목하는 것은 응애라는 진드기다. 응애는 벌통에 기생하면서 애벌레의 체액을 빨아먹고 병원성 바이러스를 옮긴다. 그래서 양봉 농가는 해마다 응애 방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문제는 갈수록 방제의 효과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양봉농가는 꿀벌 폐사가 기후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응애의 이상번식 역시 기후변화가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는 게 양봉농가들의 생각이다.
지자체들은 어려움을 겪는 양봉농가를 돕기 위해 꿀벌을 사면 구입대금의 50%를 지원하는 ‘꿀벌 입식자금 지원방안’을 내놨다. 꿀벌이 70.6%나 감소한 경상남도는 지난 2월15일 양봉농가가 꿀벌을 구입하면 벌통 1개당 12만5천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꿀벌 60%가 줄어든 전라남도 역시 지난달 28일 벌통 1개당 20만원의 입식자금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자금 지원은 양봉농가가 개별적으로 꿀벌을 구입한 뒤 확인 절차를 거치면, 구입대금의 50%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양봉농가들은 “벌이 있어야 벌을 사지, 없는 벌을 어디서 사라는 것이냐”고 볼멘 소리를 한다.
이런 상황을 지자체도 알고 있다. 박동서 경상남도 축산행정계장은 “현재 양봉농가들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꿀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채밀기 전에 원하는 만큼 꿀벌을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도에서 지원하는 입식자금은 올해 꿀을 채취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양봉 사육기반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양봉농가들은 입식자금 지원이 아니라, 피해보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양봉협회는 “꿀벌 떼죽음은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라며 “자연재해로 과수농가나 양식어민이 피해를 당했을 때 정부가 보상하는 것처럼 양봉농가에도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선 생태계에서 꿀벌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꿀벌 사육을 독려하기 위한 양봉 직불금제 도입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승장권 원장은 “꿀벌은 지구 생태계에 매우 중요한 생물이다. 딸기·참외·수박·고추 등을 꿀벌로 수정시키는 시설재배 농가들은 웃돈을 주고도 꿀벌을 구하지 못해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양봉산업은 단순히 꿀을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라, 농업생태계 순환을 위해 꿀벌을 사육하는 산업으로 인식하고 정부의 접근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태영호의 ‘주적’은 김기현…‘돈봉투 호재’에도 국힘 지지율 제자리
-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미국 우선주의’…‘투자보류’ 강공도 필요하다
- [속보] 윤 대통령 만난 넷플릭스 CEO “4년간 25억달러 투자” 발표
- 윤, 일본에 또 저자세…“100년 전 일로 ‘무릎 꿇으라’ 동의 못 해”
- 태영호의 ‘주적’은 김기현…‘돈봉투 호재’에도 국힘 지지율 제자리
- “구출된 수단 교민 26명, 오늘 서울 온다”…작전명 ‘프라미스’
- “조선인들 사도광산 강제노동의심 여지 없는 사실”…한·일 시민들이 밝혀냈다
- 러시아 외교장관 ‘국제평화’ 주제로 유엔 안보리 회의 주재…서방 반발
- 10대에 ‘퐁당 마약’ 성범죄…미국은 징역 20년, 한국은 집행유예
- 부성애의 승리? 알 대신 돌 품던 새, 진짜 ‘아빠’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