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한달 전기료 ‘동결’… 민심 잡겠다고 ‘통상·채권시장·정책’ 신뢰 다 잃었다
“‘유보 꼼수’로 사실상 4월 한달 요금 ‘동결’”
美 ‘한국 싼 전기료→관세 부과’ 통상 논란에
너무 많은 한전채 발행에 수급 부담 우려까지
“금통위·방통위 같은 기관 설립해 요금 결정”
4월 한달 분의 전기·가스요금이 동결됐다. 2분기 전기·가스 인상 ‘유보’ 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종 결정 권한을 쥔 당정이 ‘인상’에 대한 공감대만 이뤘을 뿐 실질적인 인상 시기는 대통령 방미 일정 이후인 5월로 미루면서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미국까지 한국의 ‘값싼 전기료’를 문제 삼고 나섰다. 한국산 철강 수출의 사실상 보조금 역할을 했으니, 관세를 물려야 한다며 통상 이슈를 제기한 것이다. 가격 결정이 유보된 사이 한국전력공사의 회사채(한전채) 발행 물량도 크게 불어나 시장에선 수급 부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보를 통해 ‘1개월 동결’이란 선례를 만들면서 ‘연료비 연동제’를 무력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가 부담을 덜어 민심을 잡겠다는 의도이지만, 통상을 비롯한 채권시장 그리고 정책 신뢰까지 모두 훼손해 버린 결정이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 “‘싼 전기료=보조금’ 관세 매겨야” 韓美 통상 이슈로 비화
24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지난 2월 말 ‘2021년산 한국산 후판’에 1.1% 상계관세를 물려야 한다는 예비판정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전기요금과 관련한 상계관세는 0.51%다. 한국이 값싼 산업용 전기 요금을 통해 사실상 철강업계에 보조금 성격의 지원을 했으니, 2021년도 통관된 철강 물품에 대해선 이에 상응하는 관세를 내놓으라는 취지다. 다만 예비판정인 만큼 정부의 추가 자료 제출 등 대응에 따라 오는 7~8월 최종 판단이 달라질 여지는 있다.
상계관세는 수출국이 직·간접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해 수출된 품목이 수입국 산업에 실질적인 피해를 초래했다고 판단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관세를 부과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제도다. 철강뿐 아니라 100여개 품목에 대해 미 상무부가 매년 조사한다. 2년 전 통관 물품에 대해 연례 판정(review) 절차를 거쳐 이것이 확정되면 재작년 통관 물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구조다.
2021년도 당시의 산업용 전기요금 상황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지금의 전기료 단가 체계와는 상황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 시사하는 점도 적지 않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제 사회와 비교해 전기요금이 유독 싼 탓에, 언젠가 통상 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이자 가장 우려했던 일”이라고 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 측에 ‘이는 특정 산업에 대한 보조금의 성격이 아니며 시장 원리에 따라 전기요금을 매겨 왔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우리나라는 현재 점진적으로 요금을 정상화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도 하나의 방어 논리로 쓰일 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산업계에 보조금을 지원하기 위해 유독 낮은 요금 체계를 유지한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정상화는 필요하다”고 했다.
◇ 벌써 9.3兆 발행 한전채… “수급 부담 주시” 경고음
전기료 인상 연기가 발목을 잡는 건 통상 이슈뿐만이 아니다. 채권시장의 우려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요금 인상이 미뤄지면서 한전이 올해도 채권을 대거 찍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전은 지난 20일까지 총 9조3500억원 어치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역대 최대 규모를 찍어낸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가량 많은 수치이자, 정부가 약속한 올해 발행량(작년의 3분의1)인 12조원에 80% 다다른 수치다.
한전은 이달 들어서만 1조3000억원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통상 이달 전기요금이 다음 달에 걷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상 유보에 따른 효과는 한달의 시차를 두고 반영될 전망이다. 한전 관계자는 “만약 4월에 당장 전기요금이 인상됐으면, 5월부터 한전채 발행량이 바로 줄어들어야 맞는 것”이라며 “동결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발행량 감소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전채가 다른 회사채 수요를 빨아들이는 이른바 ‘블랙홀’ 현상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아직은 수급 부담이 크지는 않지만, 향후 은행채·공사채 발행이 증가하는 상황이 되면 회사채 양극화를 비롯한 자금 경색 사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금리 인상 종료 및 인하 기대감이 커지는 점이 채권시장 강세 요인으로 작용하고, 경기 둔화 및 부동산 경기 침체 영향에 따른 디레버리지(부채축소)로 금융권 자금 수요가 축소되면서, 은행채 등 금융채 발행이 제한돼 지금은 수급 부담이 크지 않다”면서도 “향후 은행채와 공사채 발행 물량이 많아져 한전채 물량과 합쳐질 경우 수급 부담이 가중되면서 하위등급 크레딧의 구축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6~7월 중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 “한두달짜리 ‘유보 꼼수’ 선례 돼… ‘연료비 연동제’ 무력화”
정책 신뢰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분기별 전기료는 늦어도 분기가 시작되기 하루 전에는 결정해 왔는데, 이런 원칙을 깨트린 채 ‘초유의 유보 사태’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례를 통해 앞으로 요금 인상 요인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물가·지지율 등을 이유로 언제든 한두달짜리 ‘유보 카드’를 쓰는 꼼수를 부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어느샌가 ‘당정 협의회’라는 문턱의 힘이 과도해지면서 2021년 도입된 ‘연료비 연동제’가 무력화됐다고 쓴소리를 내고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당과 정부가 소통해서 합리적인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바람직한 창구여야 하는데, 사실상 이 단계에서 요금의 수준 등이 논의되는 현실”이라며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이라고 했다. 이어 “선진국들은 금융통화위원회나 방송통신위원회처럼 독립적인 규제위원회에서 전기나 가스요금을 결정한다”며 “여기에는 오로지 법원의 판결만으로 문제 시 개입할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우리처럼 정치는 절대 개입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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