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탈취→아이디어 베끼기'…달라지는 기업 분쟁 지형도

CBS노컷뉴스 이기범 기자 2023. 4. 24.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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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대기업-하청 중소기업 간 '기술 탈취' 양상에서
최근에는 대기업- 벤처·스타트업 간 '아이디어 침해'로 변해
아이디어 침해 여부 판단하기 어렵고 형사 처벌도 안돼
스마트이미지 제공


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하고 현재 소 200마리를 키우고 있는 청년 축산인 방성보 씨.

몸을 쓰는 일도 힘들었지만 개체별 정보와 번식, 사료, 질병 이력, 예방 접종 등 30여 가지에 이르는 항목을 장부에 손으로 일일이 적어 넣어야 하는 불편함도 작지 않았다.

방 씨는 이런 번거로움을 앱으로 해결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2018년부터 목장 관리 앱 개발에 뛰어들었다.

목장 일을 하며 주경야독으로 쌓은 코딩 실력을 바탕으로 앱 개발을 지휘하는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도 했다.

2년간의 노력 끝에 지난 2020년 5월 목장 관리 스마트 프로그램인 '키우소' 앱을 정식으로 출시했다.

그 해 12월에는 농협이 주최하는 '농식품 창업 아이디어전'에 앱을 출품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농협과 업무협약(MOU)를 맺고 농협 본사를 방문해 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농협이 방 씨의 앱과 유사한 스마트 목장관리 플랫폼인 ' NH하나로 목장'이라는 앱을 내놨다.

방 씨는 농협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베꼈다고 보고 있다. 농협과 MOU를 맺고 설명회를 여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업 모델과 앱의 구체적 서비스 내용 등이 농협에 전달됐기 때문이다.

방 씨는 "농협 디지털팀이 회원으로 위장 가입해 키우소 앱을 장기간 모니터링 해왔다"며 "농협 앱이 (키우소 앱과) 75%의 유사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프링커 코리아'의 윤태식씨는 소비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내려받아 피부에 일시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프린터와 안료를 개발했다.

세계 굴지의 화장품 회사들과 협업 문제를 논의하던 중 지난 2019년 LG생활건강으로부터도 협업 제의가 들어왔다.

비밀유지계약(NDA)까지 맺고 각종 사업 자료 등을 LG측에 전달했다.

잘 될 것으로 생각했던 LG와의 협업은 그러나 담당자와 연락이 두절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윤 씨에게 부품을 납품하던 협력업체로부터 'LG가 피부 프린터 장비를 외주 주려고 한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 사이 LG측은 윤 씨 회사가 출시한 프린터를 잇따라 구매했다. 급기야 LG는 지난 2021년 타투 프린터로 특허를 냈다.

윤 씨는 'LG측이 우리 사업 자료와 구입한 실물 프린터를 역설계해 자신들의 제품을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최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 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기존에는 대기업이 '전속 거래'를 무기로 하청 중소기업의 기술을 공공연하게 탈취하는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대기업이 '협업'을 내세워 벤처·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베꼈다는 논란으로 바뀌고 있다.

앞서 사례로 든 '키우소'나 '프링커 코리아' 외에 '알고케어'와 '닥터다이어리'도 대기업과 이같은 아이디어 침해 분쟁을 겪고 있다.

알고케어는 IoT 기반 영양관리 솔루션을 놓고 롯데와, 닥터다이어리는 혈당 관리 프로그램 문제로 카카오와 각각 분쟁중이다.

4곳 모두 비슷한 분쟁 구조를 갖고 있다.

벤처·스타트업 기업이 신사업, 신제품을 출시하면 대기업이 협업을 제안하고 이 과정에서 해당 사업이나 제품의 아이디어, 사업 구상, 시장 전망 등이 대기업에 전달된다.

설명회를 갖고 자료 전달하고 나면 대기업과 연락이 두절되고 이후에는 대기업이 비슷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는 식이다.

이처럼 '기술 탈취'에서 '아이디어 베끼기'로 분쟁의 양상이 달라진 것은 기술 침해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반면 '아이디어 침해'는 판단이 모호하고 처벌 수위도 낮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침해 행위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에 규정돼 있는데, '사업제안, 입찰, 공모 등 거래교섭 또는 거래과정에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타인의 기술적 또는 영업상의 아이디어가 포함된 정보를 그 제공목적에 위반해 부정하게 사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제공받은 사람이 그 아이디어를 이미 알고 있거나 동종 업계에 널리 알려진 경우 아이디어 침해로 보지 않고 있다.

재단법인 경청의 박희경 변호사는 "대기업들은 국내 벤처기업과 분쟁을 겪게 되면  해외의 유사한 아이디어를 사후에 찾으려고 애쓴다"며 "법의 헛점을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아이디어 침해 행위는 형사 처벌 조항에서 제외돼 있어 아이디어 침해 행위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정경쟁지법상 상표나 성명, 원산지 표기 등을 침해할 경우 형사 처벌하도록 하고 있지만 아이디어 침해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 대신 행정조사에 따른 '시정 권고'만 가능하도록 돼있다.

벤처·스타트업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대기업과 벤처·스타트업 간의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 강조되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기업들이 신산업 진출을 위해 벤처·스타트업계를 많이 찾고 있다"며 "하지만 아이디어침해 행위를 근절하지 않으면 오픈 이노베이션이 '베끼기'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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