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②] 2. 번화가에서 수몰지구로, 인제 관대리
미군부대 주둔 인제지역 최대 번화가
무자비한 퇴거 명령 주민 살길 막막
다리 하나 없는 육지 속 섬 전락
자전거 10분 거리 차로 1시간 걸려
2009년 38대교 건립까지 40년 고생
수몰민 “국가가 나서 인제 살펴야”
인제군 남면 관대리의 운명은 소양강댐 건설 전과 후로 나뉜다. 군 부대가 잇따라 들어서 인제 최대 번화지역이었던 관대리는 소양강댐 건설로 마을이 완전히 수몰됐다. 소양강댐이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속초와 홍천, 인제, 춘천을 연결하던 교통 요충지였다. 그러나 댐이 들어서면서 자전거로 10분이면 가던 거리는 차를 타고 1시간을 가야했고, 이도 아니면 배를 타야 할 정도로 지역은 고립됐다. 소양강댐 준공 후 50년은 인제 남면 관대리 주민들이 반세기 가까이 감내해 온 인고의 시간이기도 하다.
■ 미군부대·3군단이 들어선 인제 최대 번화가
양구를 지나 굽이치는 고개를 넘어가면 인제군 초입, 남면 관대리가 나온다. 소양강 호수를 끼고 있는 소양강댐 상류 지역이다. 이곳 주민들은 고개를 들면 호수가 보이는 이 곳에서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어느 시골마을이 그렇듯 이 곳 역시 젊은 사람들 찾기가 쉽지 않다. 관대리가 처음부터 지금처럼 소박한 모습은 아니었다. 수몰민 김대현(68)씨는 “소양강댐이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관대리는 인제지역 최대 번화가”라고 했다. 인제군 남면 관대리는 해방 이후, 복잡했던 한국 현대사가 응집된 곳이다. 6·25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 정세는 급박하게 흘러갔다. 북을 코 앞에 둔 접경지역은 하루가 다르게 지도가 변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인제 남면에는 미 10군단이 들어섰다. 미 10군단 이후 제1야전사령부가 터를 잡았고 곧이어 3군단이 주둔했다. 인제에 들어선 제1야전군사령부는 대한민국 최초의 야전군이기도 하다. 이 당시가 남면 관대리의 최대 전성기였다.
38선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는 수몰민 문종만(77)씨는 “신남, 남면, 부평이 그때만 하더라도 인제읍보다 마을 규모가 크고 상권도 강했다”며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풍요로웠던 시절”이라고 했다. 드넓은 백사장과 활주로, 미군부대는 당시 남면지역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김대현씨는 “물이 참 깨끗했고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핀 백사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런 관광유원지는 없겠다’ 싶다”며 “미군들이 마을에 나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수몰민 심영근(67)씨는 아직도 백사장과 군부대 지역에서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 심영근씨는 “백사장에서 군인 아저씨들한테 태권도도 배우고 훈련 때 만들어 놓은 고무보트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며 “간혹 미군들이 뜯지 않은 초콜릿이나 햄을 땅에 묻어두기도 했다. 그걸 찾으면서 신났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수몰 전 마을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늘 중학생 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심영근씨는 댐 수몰로 중학교까지 인제에서 졸업한 후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지난 2009년쯤 다시 고향인 관대리로 돌아와 막국수집을 운영하고 있다. 언덕에 위치한 그의 가게에서는 소양강댐 상류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물에 잠긴 고향이 그립기만 하다. 심영근씨는 “서울에서 산 시간도 만만치 않은데 늘 고향 생각이 난다”며 “수몰 당시 9세, 6세였던 동생들은 관대리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만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 댐 아래 완전히 잠긴 마을
1967년 소양강댐 공사가 시작되자 백사장도, 친척끼리 모여 살던 집들도 더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문종만씨는 “공사는 1967년부터 했지만 이미 1965년부터 측량이 시작됐다”며 “그때부터 마을 주민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남면의 피해가 컸다. 신월리, 신남리, 부평리, 남전 1리, 남전 2리, 관대리, 신풍리, 두무리가 수몰됐다. 이 중에서도 관대리는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지금의 관대리는 당시 주민들 중 일부가 산 중턱까지 올라와 터를 잡은 곳이다. 심영근씨는 “산 중간에 마을이 생긴 셈인데 옛날에는 여기에 올라 올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3군단은 기린면 현리로 옮겨갔고 조선시대부터 살았던 청송심씨 집안도 이주를 서둘러야 했다. 그나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주민들은 사정이 나은 경우다. 이주조차 어려운 주민들은 멀리 가지 못했다. 김대현씨도 마찬가지다. 김대현씨는 “국가에서 나가라고 하니 나가야 했던 때”라며 “중학생 때 공사가 시작됐는데 당시 이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떠밀려 떠난 데다 물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의 생활이 쉬울 리 없었다. 김대현씨는 “어느 정도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나가라고 해놓고 이주 이후 주민들을 위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며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스스로 해야 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도 못한다”고 했다.
댐 건설이 마무리되면서 인제와 양구간 행정지역에도 변화가 생겼다. 인제 남면 두무리는 양구군 남면으로 편입됐고 양구군 남면 상수내리와 하수내리·춘성군 북산면 수산리가 인제군 남면으로 편입되면서 상하수내리가 됐다. 남면 지역 어르신들은 “마을은 뺏겨도 고향을 등지고 갈 수가 없다”며 인제에 남았다. 인제로 돼 있는 주소지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그래도 그때는 수몰 이후의 고통이 평생을 휘어감을 줄 몰랐다.
마을을 내주고, 댐이 들어선 대가는 혹독했다. 가끔 날씨가 가물면 집 터가 드러나 내려가 그 땅을 밟아보기도 했지만 5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펄에 파묻혀 고향의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남면 주민들은 40여 년을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속초와 홍천, 춘천까지 연결하던 교통 요충지였던 남면은 순식간에 다리 하나없는 곳으로 전락했다. ‘육지 속 섬’이 된 셈이다. 자전거로 10분이면 가던 신남까지 가려면 차로 1시간, 아니면 배를 타야했다.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통학선까지 등장했다. 인제읍으로 가려면 양구군 남면 두무리와 광치령을 거쳐야 했다. 이 생활이 38대교가 들어선 2009년까지 이어졌다. 김대현씨는 “도로가 연결되지 않으면서 완전히 고립돼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고 했다.
■ 이제라도 적절한 보상을
접경지역 쇠퇴와 맞물려 인제 역시 마땅한 지역 성장 동력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수몰 주민들은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인제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현씨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곳이 인제”라며 “그때야 나라 전체가 살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먹고살만한 곳이 됐으니 희생만 해 온 인제에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춘천시와 K-water가 올해 10월 수몰민을 위해 망향비를 세워준다고 하는데 진작 해줬어야 한다. 그런 것도 안 해 주고 산 세월이 50년”이라며 “여기 사람들처럼 착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덧붙였다.
심영근씨는 “댐이 없었으면 관대리는 100% 관광지가 됐을 것이다. 군부대로 유명한 곳이니 당시 인제에서 근무했던 군인들이 인제를 다시 찾아 그때를 회상할 수 있고, 주민들이 마을을 기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문종만씨는 “지금도 소양호를 바라보면 이웃들이 자꾸 생각나고 그립다”며 “관광산업도 취약하고 군부대도 점점 떠나는 이 곳을 누가 찾겠냐”고 반문했다. 오세현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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