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전 일시정지' 단속, 뿔난 운전자들... 신호등 설치가 답일까?
"준수 어렵고 복잡" 경찰 단속에 반발
횡단보도 위치조정 등 대안 요구 쇄도
전문가 "교통체증 등 부작용이 더 커"
23일 오전 서울 광진구의 한 교차로. 전방 신호가 빨간불인 데도 1톤 트럭이 멈추지 않고 첫 번째 횡단보도를 지나친 후 그대로 우회전했다. 보행자가 두 번째 횡단보도를 건널 참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30분간 지켜본 결과, ‘우회전 일시정지’ 의무를 준수한 차량은 21대 중 5대에 그쳤다. 이곳에서는 올 2월 횡단보도를 건너던 70대 여성이 우회전하던 25톤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큰 사고를 겪고도 별반 달라진 건 없는 셈이다.
단속만 안 했을 뿐, 해당 차량은 범칙금 부과 대상이다. 전날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계도기간이 끝나면서 모든 운전자는 교차로에서 직진 방향 신호가 빨간불이면 우회전하기 전 마주치는 횡단보도 앞에서 정지해야 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악법 중 악법”이라고 분개했다. 택시기사 70대 정모씨는 “전방 신호가 적색일 때 멈추고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없을 때까지 기다리다, 다른 쪽 교차로 신호가 바뀌며 발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법을 어떻게 지키란 거냐”고 비판했다. 30대 김모씨도 “처음엔 보행자 유무만 따져 우회전하라더니, 이젠 전방 신호, 보행자에 따른 시나리오가 몇 개인지 숙지하기도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운전자들은 지키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우회전 규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가령 교차로에 우회전 신호등을 설치해 ‘초록불 우회전, 빨간불 멈춤’ 같은 식으로 교통체계를 단순화하거나, 횡단보도 위치를 조정해 우회전 사각지대를 최소화하자는 의견 등이 나온다. 이런 주장은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에 ‘윈윈’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라는 게 교통 전문가들 얘기다.
우회전 신호등 설치? "교통체증 불가피"
우회전 신호등이 가장 편리한 방안인 것은 맞다. 복잡한 법규를 숙지할 필요 없이 신호등 색깔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다. 실제 전날 오후 우회전 신호등이 설치된 경기 성남시 수정구의 한 교차로를 1시간 정도 관찰해 보니, 적색 신호에 우회전한 차량은 10대가 채 되지 않았다. 한 교통경찰관은 “신호등 위반을 블랙박스로 찍어 신고하는 사람이 많아서 운전자들이 신호는 잘 지키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조준한 삼성교통문화안전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신호등을 새로 만들면 우회전 기회가 현격하게 감소한다”고 단언했다. 예컨대 일반 교차로에서는 전방 신호가 적색이든, 녹색이든 서행하면서 우회전 차량이 빠져나갈 수 있다. 반면 우회전 신호등 체계에선 ‘녹색 화살표’ 신호가 켜졌을 때만 우회전할 수 있다. 되레 교통체증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경찰이 ‘1년간 3건 이상 우회전 차량 사고 발생’ 등 조건을 걸어 신호등을 제한적으로 설치해온 배경이다. 경찰 관계자는 “우회전 구간이 4개씩 있는 전국 교차로 2만여 곳에 신호등을 다 설치하면 8만 개나 된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횡단보도 더 밖으로? "보행권 훼손 우려"
횡단보도 위치 조정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ㅁ’자 모양으로 설치된 교차로 횡단보도를 중심부에서 10~20m가량 밖으로 밀어내면 대형차량의 우측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는 장점은 있다. 다만 보행자 동선이 훼손될 수 있다. 보행자가 사거리를 건널 때 ‘삥’ 돌아가야 해, 녹색불이 들어올 경우 횡단보도까지 가지 않고 바로 도로를 건너는 무단횡단이 늘 가능성이 작지 않다. 고준호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횡단보도 위치를 조정하면 차량의 교차로 통과시간이 더 길어지고, 덩달아 신호 시간도 더 늘어나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회전 규제가 그나마 사고를 줄이는 현실적 해법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한국처럼 전방 적색 신호에 우회전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정도”라며 “지금까지 보행자 보호보다 운전자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이 컸는데, 그런 불균형을 해소해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장수현 기자 jangsue@hankookilbo.com
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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