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 음모론은 어떻게 사라지나
당신은 속고 있다. 당신이 아는 사실은 조작된 것이다. 당신이 몰랐던 그들이 은밀하게 세상사를 조작하고 있다. 흔한 음모론이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고픈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일지 모른다. 세상사 음모가 끝도 없다지만 당신이 음모론의 피해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국 케이블 뉴스 방송사인 폭스는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가 조작됐다는 음모론을 퍼뜨려왔다. 투개표 결과를 조작한 당사자로 지목된 투개표 업체인 도미니언은 폭스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벌인 끝에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음모의 당사자로 지목된 불명예를 합의를 통해 해소한 것이다.
폭스의 패배 소식을 들은 미국 시민들은 환호와 아쉬움을 동시에 표했다. 환호는 부단히 선거조작론을 퍼뜨려 현 정부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수준을 넘어 미국 민주정에 대한 불신을 일군 음모론자에 대한 처벌이 정당하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아쉬운 이유는 복잡하다. 음모론자의 궤변과 변명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공판을 통해 확인하고, 그들에게 징벌적 배상을 명령하는 배심원 판결을 목격할 기회를 놓쳤다는 게 그중 하나다. 판결이 아니라 합의가 이뤄지면서 시민들은 음모론자로부터 어떤 후회나 사과 표명도 들을 기회를 잃었다.
실로 정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이와 같다. 악당은 민활하여 거리낌이 없건만 처벌은 느리고 답답하고 타격감도 없다. 불법은 불리하면 즉각 꼬리를 내리고 비굴한 타협을 구하지만 정의는 이겨도 어떤 ‘글로리’도 없다는 듯 겸양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길. 악당이 그렇듯이 정의도 쉬지 않기를 우리는 바랄 뿐이다. 과연 음모론이 그렇듯이 폭로와 고발을 동원한 담론투쟁과 소송도 계속되고 있다.
도미니언은 애초에 폭스만 음모의 진원지로 지목했던 게 아니었다. 우파 방송인 ‘원아메리카네트워크’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도왔던 루디 줄리아니, 시드니 파월, 마이크 린들 등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이 줄줄이 남아있다. 폭스도 도미니언으로부터만 소송을 당했던 게 아니다. 또 다른 미국 대통령선거의 투개표체계 사업자인 스마트매틱도 폭스를 상대로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을 벌이고 있다.
민주정이 허약하다는 진단과 상시적 위기에 빠졌다는 개탄이 유행한 지도 이미 오래다. 민주정의 취약함을 개탄하는 자들이 반드시 민주주의자란 법이 없다. 민주정을 돕겠다고 염려한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정을 돕는 결과를 낳는다는 법도 없다. 허약한 민주적 절차에 대한 염려가 지나쳐 비민주적 행정명령이나 반인권적 처벌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주주의 위기론을 현실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역설 아닌 역설이다.
실로 개탄인지, 선동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주장을 내세우며 민주적 권위의 원천인 유권자의 선택을 거부하는 일이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있다. 유권자 명부를 조작하고, 표를 매수하고, 유효표를 내다버리고, 개표결과를 조작한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음모론의 가증스러운 진짜 의도는 민주적 규칙과 절차 자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이런 음모론에 정색하고 대꾸하는 일 자체가 민주정의 작동을 둔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순박한 무지인지, 간교한 술책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음모론을 제기하는 그 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 진지한 분노인지, 장사꾼의 계략인지 진정한 의도를 숨기면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그 몸짓에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다. 강건한 민주정이란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에 대응하기 위하여 음모론자들이 문제 삼는 바로 그 민주적 규칙과 절차를 작동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다수인 사회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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