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문 잡아주기, 개인주의 시대의 뉴 노멀
대체 뒷사람을 위해 문을 왜 잡아줘야 하는지 오랫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캐나다에서 오신 원어민 선생님께서 한국에서 사람들이 문을 잡아주지 않는 것이 낯설었고, 닫히는 문에 부딪힐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지, 앞사람이 챙겨줘야 하나? 뒷사람을 신경 쓰면 닫히는 문을 잡아주느라 내 이동 속도를 잠시 늦춰야 하는데, 그럼 빠르게 내 일을 보러 가지 못하잖아. 참 비효율적이네’.
‘본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본인이 잘 알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인 서로를 챙기는 것보다 각자가 스스로 이기적으로 본인을 챙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 같던데. 애덤 스미스인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살아야 마땅하지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 주다니 참 비효율, 비경제적이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유아독존으로 위풍당당하게 살아왔는데, 그러다 어느새 나에게도 고꾸라지는 때가 왔다. (자세히 밝히지는 않을 것이지만)그때는 세상에게 배신당해 버려진 것만 같았고 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사람들을 마주쳐야 하는 낮이 두려웠다. 그래서 저녁에 일찍 잠들어 버리고 새벽에 일어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 생활했다.
그런데 최근 해외로 여행(베를린)을 가 있는 동안에는 해가 떠 있을 때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행이니까 낮에 다닐 일이 많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편했던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을지라도 앞사람들이 문을 잡아준 것이 분명 큰 몫을 했다. 닫히는 문이 나를 향해 돌진하지 않도록 앞사람이 나를 살피며 문을 살짝 잡아줄 때마다 묘하게 나의 존재를 응원받는 것만 같았다. “네가 뒤에 있구나, 너를 생각하고 있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앞에 있어, 문을 잡아줄게, 부딪히지 않길 바라…”라는 말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흡사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것처럼, 그리고 훗날 넘어지더라도 일으켜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을 잡아주는 것에 그런 마법 같은 효과가 있다고 느꼈다.
마치 영화 ‘아바타’의 “I see you”라는 말이나, 영화 ‘왕의 남자’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두 광대가 “이봐,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고 대화하던 것처럼.
바쁘고도 바쁜 뉴욕 사람들은 성난 사람들처럼 분주히 걷다가도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준다는 말이 있다. 5년 전 뉴욕에 갔을 때 실제로도 그렇게 느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과도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또한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자주 목격한 광경인데, 같은 문화의 연장선으로 느껴진다. 개인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따스함을 회복하는구나, 자신이 속한 세상을 다시 사랑할 용기를 이렇게 얻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자취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베를린과 뉴욕처럼 부산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낯선 익명의 사람들 속에서 지내는 곳이다. 그렇게 생경한 곳으로 상경하기도 하고 부산으로, 또 다른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린다. 지방에는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긴다.
대가족은 없어지고 가족 구성원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도 감소하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과 가족에게 지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개인주의가 강화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쓸쓸해지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수많은 독거인들이 있다. 실제로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독거인인 사람들도 있다. 문밖을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을 잡아 준다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도, 비유적으로도.
우연인지 한국의 우울증 유병률은 세계 최고이고 치료율은 세계 최저이다. 우울한 사람도 많고 치료를 받을 용기를 가지기 또한 힘들다는 말이다. 어쩌면 한국에는 문 잡아주기 같은 일상에서 이루어지고 또 보편적인 정신적 지지 행동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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