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환 “딸에게 스타 정치인 아닌, 수많은 생명 구한 ‘소방관 아빠’이고 싶다”
총선 불출마 선언 오영환 의원
29세 새내기 소방관 앗아간
전북 김제 화재 사고로 결심
법·제도가 비극 막을 수 없다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재난 현장
3월 4일은 서울 홍제동 주택 방화 사건으로 6명의 소방관이 순직한 지 22년 된 날이었다. “집 안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말에 화재 현장으로 재진입한 소방관들이 불에 탄 건물이 무너져내리면서 참변을 당했다. 추모식 이틀 뒤인 3월 6일, 전북 김제의 한 목조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말에 혼자 불길로 뛰어든 스물아홉 살 소방관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 오영환은 절망했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겠다고 3년 전 소방복을 벗고 정치에 뛰어든 그였다. “22년 전 선배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뛰어들었을 막내 소방관의 죽음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나 하는 자책이 몰려왔죠. 내가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다면 내려놓는 것이 맞는다, 동료 소방관들 곁으로 돌아가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는 것이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월 10일, 오영환(35)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문에서 “오로지 진영논리에 기대 상대를 악마화하기 바쁜 정치 현실에 대해 책임 있는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도 개탄했다.
◇ 동료 소방관들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전북 김제 화재 사고가 불출마의 직접적인 계기인가요?
“제가 국회에 들어온 3년 동안 열 분의 소방관이 돌아가셨습니다. 성공일 소방교의 죽음으로 아주 오랫동안 버텨온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셈이지요. 아, 더 이상은 안 되겠구나. 현충원의 그분들 묘역 앞에서 ‘제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부족합니다, 이젠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020년 정치에 입문할 땐 국회에 소방전문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 아니었나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인데 그때 제게 요청이 왔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샌드위치 패널(가연성 건축자재)을 퇴출한 건축법 개정 등 소방관들의 숙원이었던 여러 입법 과제도 해결했던데요.
“당선 직후 4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천물류창고 화재 참사를 보고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건설업계 반발이 극심했지만 여야 의원들의 합심으로 1년 만에 통과될 수 있었죠. 그때는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기쁨으로 벅찼는데, 법 시행을 앞두고 냉동 창고에서 똑같은 사고가 발생해 세 명의 소방관이 순직했습니다. 한발 늦어버린 제도의 한계 앞에 절망했지요.”
-문재인 정부 시절 소방공무원 2만명이 충원됐는데 왜 비극이 반복될까요.
“최소 정원 기준에 미달한 곳이 여전히 많습니다. 소방차 한 대에 4~5명이 타야 하는데, 충원이 이뤄지지 못한 지역은 2~3명이 탈 수밖에 없고, 전국적인 편차가 여전히 크지요. 김제 화재 역시 소방관 2명이 출동했습니다. 현장에 2명의 동료만 더 있었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원통함이 있지요. 이런 상황을 사고 직후 국회로 돌아와서, 또 대통령실과 행안부에 설명을 드렸지만 아무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강릉 대형 산불 당시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고정익 항공기 도입이 시급하다’고 제안했죠. 국가가 재난 안전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기후변화 등으로 재난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고 안전에 대한 국민적 눈높이는 매우 높아졌는데, 정부와 관료 집단은 새로운 변화, 새로운 투자에 인색하고 보수적입니다. 매번 ‘복사 붙여 넣기’ 식으로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지요. 윤석열 대통령께서도 안전에 대한 수많은 발언을 하셨지만 과감하고 획기적인 태도를 보여주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핼러윈 참사도 불출마에 영향을 주었나요?
“행안부와 시군구청이 재난 발생 시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이 법에 부여돼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히려 정부가 현장에서 발생한 모든 책임을 소방서장에게 떠넘겼을 때 구조대원들이 느꼈을 참담함을 저는 알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하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의정 활동에 한계를 느낀 거군요.
“법과 제도를 아무리 좋게 만들어도 국민들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국회가 아니라 현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 사투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고생길인데요.
“정치권에서의 고생만큼은 아닐 겁니다(웃음). 저에겐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한 곳,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 어차피 공천 못 받아? 굉장히 모욕적
-기자회견문에는 정치권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습니다.
“국민을 통합해야 할 정치가 갈등을 이용하고 조장하고 방치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에 대한 성찰입니다.”
-책임져야 할 이가 책임지지 않고, 잘못한 이가 사과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 정치에서 개혁돼야 할 첫째 대상이라고도 했지요?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최근의 많은 현안들에서 여야 정치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타 정치인이 되려면 상대를 악마화해야 하는 정치 풍토를 질타했습니다.
“많은 주목을 받는 것, 인지도가 최우선이라는 정치 풍토는 옳지 않습니다. 독설이 때로는 국민께 통쾌함을 선물하지만, 누군가를 악마화하고 깎아내리며 오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선동 정치는 갈등만 부추길 뿐입니다.”
-오 의원 역시 원내대변인으로 ‘입’ 역할을 하지 않았나요?
“현 정부의 실정을 비판할 때도 정책적 측면에서, 다수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무리한 표현은 빼고 절제하면서. 그래서 스타 정치인이 되지 못했지만요(웃음).”
-불출마 선언 후 오해도 받으셨지요? 이낙연 계열이라 어차피 공천받을 수 없어서라든가, 문희상 전 국회의장 아들에게 양보하기 위해서라든가.
“굉장히 모욕적이죠.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회견문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아주 길게 썼거든요.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낙연 계열은 맞습니까?
“계파라 부를 만한 인연은 없으나 대선 경선 당시 저의 소신으로 가까이서 도와드렸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과는 친하게 지내나요? (오영환 의원 사무실에서는 문 전 의장이 당선 축하선물로 준 ‘光而不耀·광이불요’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마 저의 불출마 선언에 가장 놀라신 분 중 한분일 겁니다(웃음).”
-4·7 재보궐 선거 참패 때도 조국 사태 등을 사과했다가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초선 5적’이란 공격을 받았지요?
“당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분들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원망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최근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과 편협한 인식을 공유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고, 이걸 즐기고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개딸’로 불리는 강성 지지층이 밉지는 않습니까?
“그분들의 표현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미워하면 국회의원이란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돈 봉투 의혹’ 송영길, 선당후사 해야
-대통령에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손에 든 칼을 내려놓으라고도 했던데,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를 멈추라는 뜻인가요?
“아직 수사나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정당과 정당의 지도자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만남조차 거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사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이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는 국가의 주요 사안과 민생을 해결하는 데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하지 않을까요.”
-야당이 거대 의석을 무기로 국정 운영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도 많습니다.
“입법 독주는 프레임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합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민주당이 혼자 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하려는 여당의 정략적 판단이 작동했다고 봅니다.”
-’돈 봉투 의혹 사건’이 터졌습니다. 송영길 전 대표가 탈당을 발표했을 만큼 파장이 큽니다.
“송영길 당대표 시절 국민권익위가 발표한 민주당 의원 12명의 부동산 투기 의혹 때와 마찬가지로 ‘선당후사’를 본인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법적 판단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당의 어른으로서 국민이 감동할 만한 처신이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86세대 용퇴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세대, 특정 선수(選數)를 일률적인 기준으로 묶어서 (용퇴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정치를 폄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선이든 재선이든 청년위원이든 국민을 우선하는 정치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평가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내 이야기 소설로 쓴 김훈은 마음의 스승
-소설가 김훈 선생과 인연이 있더군요. 단편 ‘손’이라는 작품을 ‘당시 소방관이던 오영환이 2008년 부산 앞바다에서 조난당한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에 의지해 쓴 글’이라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칼의 노래’ ‘남한산성’을 읽고 자란 열혈 독자였어요. 작가의 첫 장편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주인공이 소방관이라는 것에도 감명받았고요. 그분의 북콘서트에 갔다가 ‘저는 소방관인데 팬레터를 보낼 수 있게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굉장히 반가워하셨지요. 이후로 현장의 경험을 글로 써서 보내드렸는데 해운대에서 열 살짜리 아이를 구한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쓰셨더군요.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불출마 선언한 사실도 알고 있나요?
“전화 드렸더니 뉴스를 봤다고, 응원한다고 하셨습니다(웃음).”
-다시 소방관이 되기 위해 공시생이 돼야 한다고요.
“그래야죠. 동료 대원들이 빨리 막내로 돌아와라, 기다리겠다, 응원하고 있습니다(웃음).”
-나이 제한은 없나요?
“만 40세라 아직. 군복무하면 3년이 추가돼서 만 43세까지 지원할 수 있습니다.”
-체력은 자신 있습니까?
“3년간 많이 망가졌지요. 살도 많이 찌고 배도 나오고. 그래도 그때로 돌아가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국회에선 3년이지만 소방관으로는 12년을 일했으니까요.”
-두 살 딸이 있지요?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가요?
“많은 사람을 구한 아빠, 소중한 생명들을 구한 아빠.”
-부모님은 어떤 분들입니까.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소령으로 예편한 뒤 여러 사업에서 어려움을 겪으셨죠. 의정부에서 부산까지 떠돌며 단칸방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은 가족과 함께라면 희망을 잃지 않고 화목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소방관의 꿈도, 저희 부모님 같은 서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발판, 최소한의 터전을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싹튼 것이고요.”
-아내인 ’암벽여제’ 김자인 선수의 근황도 전해주신다면.
“지난 9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리나라 대표로 3년만에 다시 선발됐습니다. 출산과 육아를 딛고 마지막 도전이 될지 모르는 올림픽 참가의 기회를 필사적인 노력으로 쟁취한 거라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가슴에 품고 다니는 말이 있나요?
“오늘도 무사히!(웃음) 안전하게 복귀하고, 귀가하고, 일상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특별한 축복인지 알기 때문에 그저 웃고 떠드는 일상이 내일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영환은 동료 의원들로부터 ‘젊은 꼰대’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서. 다시 소방관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말은 그래서 번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 오영환
1988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나 의정부, 부산 등지에서 살았다. 부산 의무소방대에서 병역 복무했고, 서울소방재난본부 소방공무원에 특채돼 산악구조대원, 오토바이 구급대원, 119특수구조대 항공대원으로 근무하며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를 졸업했다. 21대 총선에서 경기도 의정부 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가연성 건축자재를 퇴출시킨 건축법 등 재난안전 관련 여러 법안을 발의했다. ‘암벽 여제’로 불리는 세계적인 클라이머 김자인 선수가 배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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