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그게 아니라” 말하는 순간 정책은 실패한다
‘보도·해명 자료’ 쏟아내 놓고
“이해 못 한다”며 국민·야당 탓
국정원 ‘1장 보고서’처럼 쓰라
남북 군사 회담을 하면 북한은 한미 연합 훈련에 관한 시비부터 건다. “북침 전쟁 연습” “한반도 위기 고조”라고 비난하며 중단을 요구한다. 그러면 우리 공무원은 성실하게 미리 준비한 답변 자료로 대응한다. “북침이 아니라 방어 훈련” “전쟁이 아니라 평화 수호”라고 한다. 북측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적어온 것만 읽고 가버린다. 회담 후 기자들이 내용을 물으면 우리 공무원은 “북한이 연합 훈련을 비난했다. 정부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는 식으로 답한다. 그러면 다음 날 신문 제목은 ‘북 연합 훈련 맹비난’이다. ‘그게 아니라’는 정부 입장은 거의 실리지 않는다. 맥락을 잘 모르는 국민은 “아! 북한이 한미 훈련을 싫어하는구나”라는 인상을 굳히게 된다.
남북 국회 회담을 하면 북한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한다. “민족 교류 탄압법” “독재 유지용 악법”이라고 목청 높인다. 그런데 회담에 나가는 우리 국회의원의 태도는 공무원과는 좀 다르다. 답변 자료를 사전에 받지만 제대로 읽지 않는다. 북한 대표가 떠드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심지어 딴짓도 한다. 참다못한 북 대표가 “보안법 어떻게 할지 답하라”며 책상을 내려치면 의원은 “하기로 했던 남북 국회 회담 날짜나 빨리 달라”고 되묻는다. 이후 기자들이 회담 내용을 물으면 의원은 “회담 날짜를 빨리 달라고 했고 북측도 검토하겠다고 했다”고 말한다. ‘북측의 다른 요구는 없었냐’고 물으면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답한다.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기억이 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 제목은 ‘남측, 북측에 회담 날짜 재촉’이다. “보안법 폐지” 운운은 북한 선전 매체에나 실린다. 국민은 북 주장이 아니라 정부가 북에 하려고 했던 말을 알게 된다.
정부의 근로시간 유연화 정책이 ‘주 69시간’ 프레임에 걸려 좌초할 위기다. 일주일에 최장 12시간까지만 허용하는 연장 근로를 월·분기·반기·연간 등으로 탄력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이 애초 정책 의도인데 ‘주 69시간=과로사’만 남았다. 정부 발표 자료에 ‘69시간’은 없었다. 지금 법으로도 최장 69시간이 가능하지만, 현장에서 적용하는 기업은 사실상 없다고 한다. 누군가 ‘주당 최장 몇 시간이냐’고 물으니 성실하고 모범적인 공무원이 열심히 계산해서 나온 ‘이론상 숫자’에 가깝다. 이 숫자가 문제가 되니 정부와 대통령실은 일제히 ‘그게 아니라’로 시작하는 해명을 쏟아냈다. 내용은 복잡하고 전문적이다. 어떤 국민이 정부 해명을 수긍하겠나.
한일 정상회담은 더 황당하다. 정상회담에서 일본 측이 독도 문제를 언급한 것처럼 일본에서 보도됐는데 외교부 장관은 “정상회담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말해 사태를 키웠다. 위안부 합의, 후쿠시마 수산물 문제에 대해 일본 측이 왜곡된 주장을 했을 때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해 국민 의심을 키웠다. 정작 ‘그게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할 때는 그러지 않았다. 이는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전 정부처럼 통계 조작, 왜곡으로 국민을 속이라는 게 아니다. 정책 부서들은 ‘보도 자료’라는 걸 낸다. 그런데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기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19세기 문장 같다. ‘이걸 쓴 사람은 내용을 이해할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잘 쓰는 부서도 있다. 한 장짜리 정보 보고서를 쓰는 국가정보원이 대표적이다. 대다수는 암호문 같은 보도 자료와 ‘그게 아니고’식 해명 자료를 내면서 “정책 홍보는 어려운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야당 탓, 국민 탓 그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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