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쑨원의 민생, 정치권의 민생

기자 2023. 4.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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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은 민생주의에 대해 두 가지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본의 쏠림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석훈 경제학자

쑨원의 민생주의 설명이다. 중국 국민당을 이끌었던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내세웠다. 흔히 이것을 ‘삼민주의’라고 부른다. 쑨원은 일제에 맞서 공산당과의 적극적 협력을 만들었고, 결국 두 차례에 걸친 국공합작이 있었다.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밀려났다. 쑨원 사후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 쑨원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쑨원의 의미는 각별하다. 나중에 쑨원의 부인 송경령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사망 직전 중국 공산당 명예주석이 되었다. 주은래는 그녀를 ‘손부인’이라고 각별히 예우했다. 중국과 대만 모두 쑨원에 대한 일종의 상징 투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외국에서는 거의 안 쓰는데, 한국 특히 정치권에서 독특하게 즐겨 쓰는 용어가 두 개 있다. 서민과 민생이다. 의미를 살려 영어로 번역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서민은 아무 벼슬이나 지위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 조선시대 용어다. 민중이라는 말이 ‘빨갱이 용어’로 낙인찍히면서 오늘날에는 민중 대신 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경제적 주체 혹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수동적 객체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용어 자체가 봉건주의 시대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역사적 주체로서의 의미는 용법상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정치권 특히 여당에서는 서민의 일부를 연령으로 떼어내 ‘미래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특권이 없다는 것과 투표할 때 외에는 주체가 아니라는 의미가 같다. 쓰는 사람들은 ‘청년 서민’ 정도의 의미로 쓰는 듯하다.

민생은 쑨원의 민생주의에서 왔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당들은 쑨원 국민당의 후계자들인 것일까? 민주당은 대만 국민당과는 상관이 없지만, 여당인 국민의힘은 어떻게 보면 이념적으로 같은 계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쑨원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재명이 사법위기를 넘어가기 위해 내건 용어가 ‘민생’이었다. 국민의힘 역시 전당대회를 통해 김기현 대표가 선출된 후 ‘민생119’라는 이름의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내용으로 보면 여야가 말하는 민생은 쑨원의 민생과는 상관없다. 토지와 농민 문제 해결과 자본 독점 완화가 민생주의 양대 축인데, 그런 핵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비켜갈 때 주로 민생이라는 용어를 쓴다. 농민이 민생주의의 기본 축인 걸 생각해보면, 양곡관리법에 대해 별다른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거부권만 행사하는 국민의힘은 쑨원식 민생과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

민생을 기존의 용어와 비교해보면 DJ의 ‘대중경제’와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 정도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집권 이후에는 대중경제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경제적 ‘을’을 보호하기 위한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는 자영업자의 어려움과 함께 어느 정도 자리는 잡은 것 같다. 국민의힘에는? 역시 부자 정당 이미지대로 약자들에 대한 정치활동의 흔적은 별로 없고, 정치적 위기 때 잠시 민생을 얘기하다 말았던 것 같다.

쑨원의 민생주의에서 주체성을 뺀 민생이라는 독특한 한국식 용어가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국민들의 정치 불신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정당의 정치 행위는 해롭거나 자기 이익주의로 보고, 그게 아닌 ‘민생’을 주로 해달라는 것이 정치평론계의 암묵적 합의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주체를 빼고, 구조를 뺀, 그리하여 정치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민생’이라는 것은 경제학에서는 허구적 개념이다. 누군가 손해를 보지 않고 누군가 이익을 볼 수가 없는 상태, 흔히 ‘파레토 최적’이 선진국 경제의 기본 상태다. 누군가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다른 선진국에서 민생이라는 개념을 안 쓰는 것은 이 개념이 신화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이념과 상관없는 경제 주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출생 문제, 자살 문제가 그렇다. 지방 공항이나 케이블카 같은 것은 토건주의와 관련되어 있는데, 여야가 따로 없이 다시 토건으로 달려가는 시기, 이마저 민생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럼 뭐가 남나? 구조적 접근 없이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천원의 아침밥’ 정도 남는다. 그것도 시범사업 규모를 넘어 점심과 저녁 문제 그리고 모든 대학 규모로 가면 해법이 어려워진다.

주체 문제를 피하고 구조적인 것도 피하고, 그렇게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경제 문제는 별로 없다. 오죽하면 경제시스템을 ‘복잡계’라고 부르겠는가?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다면 ‘생활경제’ 정도로 어깨에 힘 빼고 가볍게 접근해도 좋을 것 같다. 눈에 힘 딱 주고 ‘민생’이라고 한다고 구조적 경제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우석훈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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