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농수로에 대한 불편한 진실

경기일보 2023. 4. 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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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19만3천104㎞.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구 네 바퀴 반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 설치된 농수로 총연장이다(한국농어촌공사 2022년).

농수로는 농경지에 필요한 물을 대고, 쓰고 남은 물을 빼는 역할을 한다. 농수로가 있기에 논에 물을 대 모내기를 할 수 있고 농업인의 땀방울이 더해져 우리의 주식인 쌀이 만들어진다. 즉, 농수로는 한민족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자 중요 농업생산 기반시설이다.

과거 농수로는 흙으로 둑을 쌓아 물길을 만든 흙수로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흙수로를 콘크리트 수로로 개조하는 정부 주도 사업이 진행됐다. 사업은 현재진행형으로 2020년에서 2021년 한 해 사이만 해도 전국적으로 흙수로 1천176㎞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수로는 5천624㎞ 생겨났다.

콘크리트 수로는 여러 강점을 가지고 있다. 통수단면적이 크므로 농업용수의 신속한 공급과 배출에 유리하다. 또 용수 손실률이 적고 유지관리가 용이하다.

하지만 명과 암이 존재하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콘크리트 농수로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는 흙수로와 달리 콘크리트 농수로는 직각 형태다. 시간당 가장 많은 양의 물을 전달할 수 있는 공학적으로 효율성이 검증된 구조이지만 생물들에게는 무덤이 된다. 콘크리트 농수로에 빠진 각종 생물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직각 농수로는 양편의 서식지를 분리시킨다. 이 논과 저 논 사이 콘크리트 농수로가 가로지르면 야생동물은 반대편 논으로 쉽게 건너갈 수 없다. 농촌 경관, 특히 논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농수로는 서식지 이동에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한다.

실제 농수로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농수로를 따라 걸으며 동물의 흔적이나 사체가 있는지를 관찰했다. 연이어 죽음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죽은 지 얼마 안돼 사후경직이 진행 중인 고라니가 농수로 한편에 누워 있다. 백골화돼 뼈만 남은 고라니며 너구리도 나타났다. 말라 죽은 참개구리도 여럿이었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204㎞ 샘플 구간에서 폐사체의 출현빈도는 ㎞당 0.48건으로 나타났다. 사체 유실과 부패를 감안하면 실제 폐사 위험은 더욱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평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동물들의 애꿎은 죽음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 피해 저감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동물이 농수로에 빠졌을 경우 빠져나올 수 있도록 경사진 탈출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전국 농수로에 탈출시설이 설치된 구간은 1% 남짓이다. 적극적인 탈출 시설 확대 설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존 ‘ㄷ’자형 수직벽면보다는 V자형으로 벽면에 비스듬한 경사를 주어 야생동물의 탈출이 쉽도록 농수로를 설치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제 곧 모내기 철이다. 들녘 여기저기서 저수지 수문을 열어 물을 흘려보내며 풍년을 기원하는 통수식 행사가 열리고 있다. 겨우내 봄의 흙은 물을 많이 마실 것이고 무논은 푸르러질 것이다. 오늘도 맛있게 먹는 밥 한 공기엔 농수로의 지분도 상당하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농수로가 뭇 생명들의 안전도 챙기는 정정당당한 구조물로 거듭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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