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94] 윤선도와 금쇄동(金鎖洞)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3. 4. 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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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어도 두려움이 없고(獨立不懼),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숨어 있어도 고민이 없다(遁世無悶)’는 말이 있다. 홀로 있기 어렵다. ‘독립’과 ‘둔세’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살았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니까 그의 삶은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려고 하였고, 그 은둔 속에서 독립적으로 살려고 하였다. 누구한테 굽신거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장원(莊園)이다. 장원은 수만평 또는 수십만평의 넓은 자연 속에 정자, 초당, 주택을 지어 유유자적 할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고산은 살아 생전에 총 4개의 장원을 조성하였다. 해남에 문소동, 수정동, 금쇄동 장원을 지었고, 보길도에 부용동 장원을 꾸며 놓았다.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현재의 녹우당도 집 뒤의 덕음산까지 포함하면 50만평에 달하는 장원에 해당한다.

조선조에 윤선도처럼 총 5개의 장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럭셔리하게 살았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의 둔세(遁世) 방식은 장원이었고 그 장원 조성을 뒷받침했던 배경에는 경제력이 있었다. 해남윤씨 윤선도 집안은 당대에 ‘국부(國富)’ 소리를 듣던 재벌 집안이었다. 그 경제력의 밑바탕에는 간척 사업이 있었다. 뻘이 많았던 전남 해안가의 여러 곳에 간척 사업을 벌여서 토지를 확장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해남윤씨는 ‘간척 부자’였다.

금쇄동은 ‘쇠로 된 자물쇠’라는 뜻이다. 지명 자체가 폐쇄적이다. 자물쇠로 잠겨 있으니 외부에서 쉽게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300미터의 해발이고, 정상 부근이 평평한 산이지만 요새 지형에 가깝다. 조선 초에는 구산성(拘山城)이라는 산성이었다.

금쇄동에 올라가서 전체 지형을 살펴보니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터였다. 두륜산 도솔봉에서 출발한 맥이 유턴을 한 지점이다. 지세의 맥이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을 유턴해서 다시 되돌아보는 형국의 터가 회룡고조이다. 명당으로 꼽힌다. 기운이 부드러우면서도 오래가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터가 회룡고조 형국이었는데, 금쇄동에 올라와서 보니까 파르테논과 유사한 풍수적 구조였다. 풍수적 원리는 유럽이나 한국이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금쇄동 입구에서 중간쯤 올라가니 작은 폭포가 있고 바위가 있는 전망 좋은 곳이 있다. 여기에 휘수정(揮手亭)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정자터가 있다. ‘손을 흔든다’는 뜻이다. 세상으로 나오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겠다는 은유가 깔려 있다. 장원에 숨었던 고산의 인생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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