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대한민국] 발전 용량 16GW인데 송전 용량은 11GW… 부족한 건 전기가 아니라 송전망이다
강원·수도권 송전선로 확충 계획 주민 반대 등으로 8년 늦어져
대규모 철탑 지중화해야… 막중한 비용에 정치권은 ‘외면중’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전기에 의존하고 있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은 더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가정의 텔레비전과 세탁기는 계속 커지고 있으며, 식기 세척기와 의류 건조기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제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과거 가스를 사용하던 부엌의 풍경도 점차 인덕션으로 바뀌고 있으며, 전기자동차는 신기한 대상이 아닌 대중화된 존재가 되고 있다. 모든 것이 전기로 움직이는 전기화(electrification) 현상이 더욱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인 전기는 모두 선으로 연결되어있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 집의 콘센트부터 동해안의 원자력발전소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우리 몸의 혈액이 대동맥에서 모세혈관을 거쳐 이동하는 것처럼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4만2720개의 송전탑과 3만5451km의 전선으로 이루어진 송전망, 그리고 1008만4070개의 전봇대와 53만5242km의 전선으로 구성된 배전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적인 삶은 구리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력망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호당 정전 시간은 연간 8.9분으로 미국(47.3분)과 영국(38.4)은 물론 독일(10.7분)보다도 짧아 안정적이며, 송배전 과정의 손실률도 3.5%로 미국(5.1%), 독일(6.8%), 일본(4.7%)보다 낮아 효율적이다. 발전과 송·배전으로 구성된 전력망은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특징이 있다.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전기는 넘쳐도, 부족해도 안 되는 특성이 있다. 수요 변화에 따라 발전량을 가감하는 작업은 컴퓨터와 인간의 협력을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신형 설비로 이루어진 대규모 발전소와 한전이라는 단일한 망 사업자가 세심하게 관리하는 송·배전망을 통해 대한민국의 일상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력망은 최근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비교적 고르게 권역별로 전기 소비와 공급을 맞추도록 노력해왔지만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이 계속되면서 지역 간 전력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할 때 수도권은 필요한 전력의 72%만을 자체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전·충청권(128%), 호남권(120%), 영남권(133%), 강원권(182%) 등은 전력을 초과 생산하고 있다. 수도권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비수도권 전력을 수도권으로 공급하는 7개의 융통 선로가 현재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 수도권 지역에 대규모 전력을 소모하는 데이터센터(IDC)와 반도체 라인 신·증설이 집중되고 있어 이에 필요한 전력을 적시에 공급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3·4공장(P3·4)을 위한 송전 선로 건설 과정에서 주민 반대로 5년이 넘는 협의 기간과 지중화를 위한 추가 비용 수천억 원이 발생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수도권 남부의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형성은 장밋빛 미래로 보이지만 전력망을 운영하는 처지에서 보면 악몽 같은 미래인 것이다.
수도권의 송전망 확충이 미래 문제라면 동해안 지역의 송전 선로 부족은 현재 문제다. 동해안 지역에 대규모 석탄화력발전소가 2022년부터 속속 가동에 들어가면서 대규모 전력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를 송전할 선로 부족에 따라 동해안 지역의 발전소들은 40% 수준으로 출력을 낮춰 가동하거나 아예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 동해안 지역의 발전 용량은 16GW지만 송전 선로 용량은 11GW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올해와 내년 완공 예정인 발전소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규 원자력 발전소인 신한울 2호기까지 올해부터 전력 생산에 들어가면서 이 지역의 송전 선로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강원도 지역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송전 선로 확충은 당초 계획대로라면 발전소 가동 이전인 2021년에 마무리돼야 했지만 주민 반대와 지자체의 인허가 지연 등으로 인해 지연된 결과이다. 현재로서는 2029년이 되어서야 계획된 송전망이 건설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가 집중되고 있는 제주 및 호남 지역도 상황은 심각하다. 대규모 전력 수요처가 없는 지역에서 전력 생산이 증가하면서 이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야 하지만 송전 선로가 부족하기 때문에 태양광·풍력발전을 강제로 중단시키거나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을 낮추는 비상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향후 새만금 및 동해안 지역의 재생에너지 확대가 예정되어 있는 만큼 송전 선로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그만큼 전체 전력망의 안정적 유지는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 더 많은 송전 선로 건설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규모 철탑과 고압 송전 선로가 자기 동네와 주변에 들어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중화와 충분한 보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이를 담당해야 하는 한전은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발전 사업자가 생산한 전력을 구입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망 사업자인 한전에 정부와 정치권이 비싸진 전기를 싸게 공급하도록 강제한 결과다. 한전 추산에 따르면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 수요 충당을 위해서는 2050년까지 현재에 비해 2.3배 규모의 전력망 구축이 필요하다. 송전망 건설 그리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망 업그레이드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 비용을 어떻게 부담해야 할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정부와 정치권은 문제를 외면하거나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는 것이 2023년 대한민국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셀린느, 새로운 글로벌 앰버서더에 배우 수지 선정...‘빛나는 존재감’
- “김준수는 마약 사건과 관련 없어… 2차 가해 멈춰달라” 2차 입장문
- [Minute to Read] Samsung Electronics stock tumbles to 40,000-won range
- “주한미군 이상 없나?” 트럼프 2기 미국을 읽는 ‘내재적 접근법’
- 온 도시가 뿌옇게… 최악 대기오염에 등교까지 중단한 ‘이 나라’
- 한미일 정상 "北 러시아 파병 강력 규탄"...공동성명 채택
- [모던 경성]‘정조’ 유린당한 ‘苑洞 재킷’ 김화동,시대의 罪인가
- 10만개 히트작이 고작 뚜껑이라니? 생수 속 미세플라스틱 잡은 이 기술
- 와인의 풍미를 1초 만에 확 올린 방법
- [북카페] ‘빌드(BUILD) 창조의 과정’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