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목표는 끝장 아닌 상대 통해 배우는 것” [차 한잔 나누며]

김수미 2023. 4. 2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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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여덟 살에 부모를 따라 동양인이 거의 없던 호주의 한 도시로 이민 간 소년은 영어를 못해 늘 외로웠다.

서 작가는 지난 21일 세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토론의 귀재가 된 배경에 대해 "다른 사람의 얘기를 먼저 경청하고 뭐든지 꾸준히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과, 어려서부터 호주의 토론 문화를 모두 경험한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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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디베이터’ 펴낸 토론 챔프 서보현
영어 못해 놀림 받던 이민 소년
교내 토론반 통해 인생 달라져
세계대회서 한인 최초 2번 우승
자신의 토론 기술·성찰 등 담아
“교감 못하는 AI, 토론에선 불리”

만 여덟 살에 부모를 따라 동양인이 거의 없던 호주의 한 도시로 이민 간 소년은 영어를 못해 늘 외로웠다. 서툰 영어로 몇 마디 하면 놀림을 당하거나 갈등을 빚게 되자 소년은 입을 닫아버렸다. 3년 후 담임교사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들어간 교내 토론반이 내성적인 이민 가정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소년은 세계학생토론대회(WSDC)와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서보현(29·사진)이다. 그는 시드니 명문 사립 바커 칼리지를 수석 졸업하고 하버드대에 조기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하버드대 상위 1% ‘주니어 24’에도 선정됐다. 호주 국가대표 토론팀과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를 맡아 후배들을 양성하고 지금은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최근 자신의 토론 경험과 기술, 토론의 세계에서 얻은 성찰을 담아 책 ‘디베이터’(문학동네)를 펴냈다.
서보현
서 작가는 지난 21일 세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토론의 귀재가 된 배경에 대해 “다른 사람의 얘기를 먼저 경청하고 뭐든지 꾸준히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과, 어려서부터 호주의 토론 문화를 모두 경험한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호주에서는 사립뿐 아니라 공립 초등학교부터 디베이트 팀이 있고, 대회도 토너먼트 형식으로 매주 열린다.

그는 토론의 매력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자기 내면의 다층적인 목소리, 여러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교실에 있어도 마치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 같다”면서 “어려서부터 미국과 유럽, 아시아의 정치에 대해 얘기하고 지구와 환경 문제 등을 다루며 글로벌 감각도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토론할 때는 나이도 없고, 계급도 없다”며 “다른 사람과 차이를 넘어 대화하며 상대에게 배우고 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품격 있는 토론을 좀처럼 보기 힘들어 다른 나라는 어떤지 물었다. 그는 “정치인들 유치하게 싸우는 건 글로벌 공통점 같다(웃음)”며 “결국 시민들이 더 좋은 대화와 토론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들이 직접 토론을 배우고 참여하며 기대치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본 가장 인상적인 토론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와 백인정권 마지막 대통령인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의 대선 TV 토론이라고 한다. 당시 정치적으로 양 극단에 있는 두 사람이 직선적이면서도 솔직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고 마지막에는 만델라가 ‘우리는 이렇게 다르고 의견 차가 크지만, 결국 같이 일하고 같이 살아야 한다’며 데클레르크의 손을 잡았다. 서 작가는 “토론의 목표는 끝장을 보는 게 아니고, 싸워서 이기는 것도 아니다”라며 “토론에서 이기거나 져도 결국 또 만나고 함께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대화를 이어가며 관계를 발전시키고, 상대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대화형 인공지능(AI)인 챗GPT가 인간보다 토론을 잘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인공지능은 어마어마한 정보수집 능력을 발휘해 자신의 주장을 탄탄하게 뒷받침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부드럽게 공감하고 타협하는 인간적 교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 AI나 로봇처럼 토론하는 것”이라며 “극단적 의견이 과잉 대표 되고, 개인이 기계와 대화에 익숙해지며 더 외로워지는 시대에 어떻게 토론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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