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없는 안전, 돈 안드는 신상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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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학교 앞에서 차에 치여 숨져도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난 2년(2021~2022년)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어린이 사망사고가 발생한 5곳을 <한겨레> 이슈팀 기자들이 살펴봤더니, 그중 한곳은 "영업방해라는 민원이 있어서" 안전펜스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한겨레>
'고구마'일지언정 공분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서, 안전펜스가 설치됐는지 따져 묻는 일이 같은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에 힘써달라"는 승아양 오빠의 요청에 응답하는 길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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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박수지 | 이슈팀장
어린이가 학교 앞에서 차에 치여 숨져도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난 2년(2021~2022년)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어린이 사망사고가 발생한 5곳을 <한겨레> 이슈팀 기자들이 살펴봤더니, 그중 한곳은 “영업방해라는 민원이 있어서” 안전펜스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불법 우회전한 화물차 앞바퀴에 끼여 아이가 숨진 곳에서는 여전히 화물차들이 학교 정문 앞을 쌩쌩 달렸다. 우회로가 없으니 대책이 없다는 이유였다. 올해 이 학교에 아이를 보낸 한 학부모는 “이 학교를 배정받으면 부모들은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저출생이 심각하다는 아우성 속에서 살아 있는 아이도 지킬 의지가 없는 나라의 단면이다.
안전에는 공짜가 없다. 펜스나 신호등 하나 설치하는 데도 돈이 들고, 이런 설치물로 인한 영업방해도 결국 돈 문제다. 다른 어떤 것보다 어린이 목숨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로 3년 전 ‘민식이법’(도로교통법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어린이보호구역 치사)이 시행됐다. 스쿨존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해자의 처벌과 사고 예방을 강화한다는 취지였다.
정작 사고가 터진 뒤 법을 살펴보니 반쪽짜리 입법이었다. 스쿨존 내 안전펜스, 신호등, 과속방지턱 등 안전시설 설치는 ‘권고’ 사항으로 남겨둔 탓이다. 운전자를 과잉처벌할 수 있다는 목소리 큰 어른들에 가려, 아이들의 사고를 실질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조항은 제대로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이달 8일 대전 둔산동 한 스쿨존에서 숨진 9살 배승아양은 안전펜스 없는 인도를 걷다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였다. 아이를 여러명 잃고 나서야 스쿨존 내 안전시설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법안이 쏟아졌다.
다른 한편으로 가슴 아픈 사고에 대한 분노의 화살은 음주운전자의 신상공개를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도 흘러갔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사고 이후 즉각 음주운전 사망사고를 낸 피의자 및 음주운전 재범자의 신상을 공개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살인 등 강력범죄나 성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처럼 말이다. “음주 치사도 살인에 준하는 중대범죄로 다뤄 음주운전자에게 경종을 울리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이에 호응하는 목소리도 많다.
이는 국민 기대보다 낮게, 법원이 가해자를 솜방망이 처벌해온 탓이 크다. 법정형으로는 음주운전 상해·사망사고를 낸 이들에게 무기징역까지 가능하지만, 판사의 형량 부과 기준이 되는 음주운전 양형기준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실제 2020년 1월부터 2022년 6월까지 선고된 스쿨존에서 어린이가 죽거나 다친 교통사고의 1심(단일 범죄) 전체 사건(165건)을 보면, 실형이 선고된 건 6건(3.7%)에 그쳤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4일 스쿨존 교통사고 관련 첫 양형기준에서도 음주운전으로 발생한 사망사고에는 ‘최대 15년형’을 권고할 예정이다. 죄 없는 어린이가 학교 앞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는데, 잘해야 15년형이라니. 신상공개라는 ‘수치형’으로나마 ‘정의구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럼에도 ‘사이다’ 신상공개를 지지하는 대신, 스쿨존 내 안전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가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형량을 강화하자는 쪽에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 무엇보다 ‘나쁜 놈’ 한명의 얼굴과 이름을 밝혀, 돈 안 드는 신상공개로 국회도 정부도 법원도 ‘할 일 했다’고 여기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신상공개를 통해 국가는 범죄예방을 위한 사회방위의무를 국민에게 떠넘기고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의무를 손쉽게 더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 ‘피의자 신상공개제도에 관한 헌법적 연구’)
‘고구마’일지언정 공분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서, 안전펜스가 설치됐는지 따져 묻는 일이 같은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에 힘써달라”는 승아양 오빠의 요청에 응답하는 길일 테니 말이다.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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