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아는 사람이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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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처음으로 봤던 도감을 기억한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악당 때문에 씩씩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더없이 여리고 다정한 사람을 위한 새로운 도감을 만들고 싶은 날이 있다.
식물을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건 낭만적이었지만, 수많은 사진과 이름을 머리 속에 넣을 재간이 없었다.
앞으로도 식물 세계의 낭만을 아는 사람이 되긴 어렵겠지만, 인간 세상의 낭만은 좀 알고 즐기는 사람이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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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어려서 처음으로 봤던 도감을 기억한다. 식물도감이었다. 세상엔 무수한 풀과 꽃과 나무가 있었다. 어떤 꽃은 봄에 피고, 어떤 나무는 겨울에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창밖은 죄다 초록인데, 저마다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때부터였나. 식물을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왜인지 이상하게 낭만적이었다. 어떤 개체의 아름다움을 정확히 기억하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직장인이 돼서는 다른 도감을 종종 본다. 아주 두껍고 새카만 책이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그 책 이름은 악당도감. 8년 동안 두 곳의 회사에서 일하며 만난 온갖 부류의 악당이 거기에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ㄱ씨, 2017년 가을 ㄴ사에서 발견, 소모적인 회의로 업무 시간을 잡아먹음’ ‘ㄷ씨, 2019년 봄 ㄹ사에서 발견,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떠넘기기로는 일등. 진짜 일등’.
악당도감 페이지는 부지런히 늘어나고, 그럴수록 사회생활에 비관이 고개를 든다. 이곳의 법칙은 각자도생, 누구에게도 함부로 틈을 보이지 말고 쉽게 마음을 내줘선 안 된다. 믿을 건 오직 나뿐이다. 이런 염세적인 말을 되뇌며 앞으로는 반드시 냉혈한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내일이면 아마 누군가 이 굳건한 각오를 무너뜨릴 것이다. 메신저로 주고받는 작은 응원으로, 커피를 함께 마시며 나누는 웃음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건네는 위로로. 점심시간 인적 드문 복도에 쭈그려 앉아 함께 수다를 떨던 동기들이 그랬고, 진심 어린 응원이 담긴 손편지를 써준 ㅁ선배가 그랬고, 외로운 순간마다 곁을 지켜준 고마운 후배 ㅂ이 그랬듯이. 그럴 때면 잔뜩 연해진 마음으로 말하게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다 사람 덕분이라고.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위로를 주는 것도 사람이라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악당 때문에 씩씩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더없이 여리고 다정한 사람을 위한 새로운 도감을 만들고 싶은 날이 있다. 하지만 알맞은 제목조차 찾지 못해 주저한다. 이 따듯한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까. 그의 상냥함을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나 고민한다.
좋은 것은 나쁜 것만큼 선명하지는 않아, 단호하고 명쾌한 글귀로 가득한 악당도감과 달리 이 책은 쉽게 써지지 않는다. 어떤 마음이 가진 아름다운 빛깔과 온도를 정확한 언어로 옮기는 법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낱말이 되지 못한 포근한 기억은 마음을 데운 뒤 쉽게 옅어지고 흩어진다.
그럴 때면 악당도감을 끝없이 써서 부풀리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악당의 공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빽빽이 쓰고, 그를 물리칠 수 있을 기술을 고민해 채워 넣고, 날마다 들여다보며 어떻게 하면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애쓰지 않을 것이다. 지치지 않고 매번 등장하는 악당들을 막을 수야 없겠지만, 고마운 사람들에게 쏟아도 모자랄 시간을 그들에게 뺏길 수는 없으니까. 악당을 상대할 전략을 고민하는 시간에 누군가의 다정함을 한번이라도 더 되새기고 싶다.
어릴 적 펼쳐본 식물도감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식물을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건 낭만적이었지만, 수많은 사진과 이름을 머리 속에 넣을 재간이 없었다. 덕분에 목련에 엉뚱한 이름을 부르고, 길가에 자라난 쑥도 알아볼 줄 모르는 어른이 됐다. 앞으로도 식물 세계의 낭만을 아는 사람이 되긴 어렵겠지만, 인간 세상의 낭만은 좀 알고 즐기는 사람이 됐으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벽을 세우기보다 누군가의 다정함에 속수무책으로 무른 사람이 되기.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기어코 마음 한편을 내어주고야 말기. 그런 인간 세상의 낭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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