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전세사기로 본 서민 수탈론

서찬동 기자(bozzang@mk.co.kr) 2023. 4. 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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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초년생들은 전월세 생활을 시작하며 곳곳의 거미줄을 헤쳐 나가야 한다. 집을 구하는 것부터 가격 흥정, 이사까지 아무리 똑부러지게 일을 처리해도 당혹스러운 일이 생긴다.

보증금 얼마에 입주하기로 얘기해놓고 계약 당일 "더 올려달라"는 임대인도 흔하다. 전세살이를 하면 평소 친절하던 집주인도 재계약 기간에는 뻔뻔해진다. 주변 시세가 올랐으니 보증금을 "몇억 원 더 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2021년 전후 전국 전셋값이 미친 듯이 급등했을 때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전 국가대표 출신 A씨도 그랬다. 그는 2019년 9월 보증금 7200만원에 아파트에 입주했다. 2년 후 임대인은 보증금을 25% 올려 9000만원으로 재계약했다. 하지만 최근 전세가가 급락하자 이 아파트 60가구가량이 전세사기 피해로 통째로 경매에 넘겨졌다. A씨는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했다.

미추홀구뿐만 아니라 서울 화곡동 등 전세사기 피해자 상당수가 2030세대 사회초년생이다. 전세사기범들은 사회적 약자를 겨냥해 생계를 송두리째 앗아갔다는 점에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선순위 근저당권이 잡혀 있는 전세 매물을 "집주인이 부자라 문제없다"고 속인 중개사도 마찬가지다.

'꼭지 가격'에 전세계약이 체결된 다세대·오피스텔 상당수가 고름이 터지고 있다. 어쩌면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문제가 불거진 화곡동과 미추홀구, 화성 동탄, 경기 구리뿐 아니라 전국에 다세대·오피스텔 전세가율이 80%를 웃도는 지역이 수두룩하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주지 못해 경매에 넘어가면 세입자는 보증금을 떼일 위기에 놓여 있다.

전세사기 문제가 일파만파 확산되자 정부가 긴급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예방책으로 보증 대상 전세가율을 낮추고, 사기범은 조직범죄에 버금가게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피해 세입자에게는 경매 진행을 6개월 이상 늦추고 우선 매입권을 주기로 했다. 또 LH가 매입해 시세의 30~40% 가격에 세입자에게 임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선 "기존 전세대출도 갚아야 하는데 또 대출받으란 말이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전세보증금 문제를 해결할 근본 대책은 없다는 점이다. 역전세난으로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는 1997년 IMF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발생했던 구조적 문제다.

일각에선 '전세제도'에 내재된 문제라며 단계적으로 월세제도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전세제도는 임대인이 보증금을 받아 담보대출을 갚거나, 다른 곳에 투자하는 등 활용도가 높다. 임차인 입장에서도 월세 부담이 없어 매달 생활비를 모아 목돈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임대차시장을 월세로 바꿔가는 것은 현재로선 힘들어 보인다.

최근 전세 사태를 보며 '왜 세입자 보증금 보호는 후순위여야 하는지' 많은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출받은 집주인이나 빌려준 금융권은 이익을 위해 대출계약을 맺은 것이다. 반면 세입자는 그 집에 대한 사용권을 위해 보증금을 맡기게 된다. 그런데 전세 사고가 터지면 피해는 고스란히 세입자가 뒤집어쓴다.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해도 금융권에 선순위 근저당권이 있어 세입자가 받는 금액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 같은 근본적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땜질 처방만 한다면 '보증금 대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제도 자체가 서민 피해는 후순위로 두기 때문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서찬동 부동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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