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중국] 장궈룽을 추모하는 홍콩인들과 ‘홍콩의 중국화’

윤석정 2023. 4. 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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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8~90년대 인기배우 장궈룽 사망 20주기에 추모 인파 몰려
광둥화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는 푸퉁화가 채워가
과거 명성 퇴색했다지만, 여전히 홍콩은 매력적인 국제도시
홍콩 중심가에 있는 지하철 침사추이역을 빠져나온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홍콩스러움’ 이랄까. 베이징의 시원시원하고 넓은 도로가 아닌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도로들과 좁은 길을 가득 메운 인파들이 여기가 홍콩임을 알려주고 있다.

지난 1일 침사추이역 모습. 홍콩에서 가장 번화한 침사추이역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 사진 = MBN

지난 1일 장궈룽 사망 20주기…궂은 날씨에도 종일 추모 인파 몰려

그날은 만우절이었다. 친한 사람들과 장난으로 거짓말을 하는 날.

20년 전 만우절에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 장궈룽(張國榮)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6년쯤 지났을 무렵. 홍콩 사람들이 본인들은 중국인이라기보다 아직은 홍콩인이라는 생각이 훨씬 강하던 시절이었다.

그 뒤로 20년이 지났다. 장궈룽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날 홍콩엔 비가 오락가락했고, 그가 몸을 던진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은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추모객이 모여 있었다. 호텔 벽을 따라 그를 추억하는 사진들과 꽃다발로 가득했고, 홍콩시민들은 긴 줄을 이뤄서 그를 애도했다.

건너편으로 가보니 한 남자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고 있냐?”고 물으니 그 남자는 “장궈룽의 사망을 슬퍼하는 팬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모습을 그려서 남기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지난 1일 한 홍콩시민이 장궈룽 20주기에 모인 추모객들의 모습을 길 건너에서 말없이 스케치북에 옮기고 있는 모습. / 사진 = MBN

홍콩 보안법 시행 3년 동안 250명 체포…홍콩에서 군중이 모이는 건 이제는 낯선 풍경

기자가 현장에 머물렀던 한 시간 동안 최소 수백 명 이상의 추모객들이 현장을 찾았다.

의외였던 건 홍콩 경찰들이었다. 경찰들은 홍콩시민들에게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서서 주기적으로 차량을 통제해 시민들이 길을 안전하게 건너게 도와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현재 홍콩의 평소 모습이 아닐 것 같다.

기자가 홍콩을 방문하기 며칠 전, 2020년 홍콩 보안법 시행 후 3년 만에 처음 홍콩에서 집회 시위를 허가했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하지만, 참가자들 목에 ‘번호표’를 달고 인원도 100명 이내로 제한됐다고 한다. 또 폴리스라인 준수, 검정색 옷 착용 금지 같은 온갖 규정을 들이댔다고 한다. 사실상 경찰의 철저한 감시 아래 시위 같지 않은 시위를 하던가 아니면 시위를 하지 않던가 양자택일을 하라는 거였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홍콩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 3년간 250명이 체포되고 그중 71명에 유죄가 선고됐다“는 홍콩 보안국장의 말이 보도되고 있었다. 물론 시위대와 추모객들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해도 민주화 시위로 크게 혼쭐이 난 뒤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해왔던 중국 정부와 홍콩 정부가 수천 명이 모인 이곳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은 건 다소 의외였다.

지난 1일 장궈룽 추모객들의 안전을 살피고 있는 홍콩 경찰들. / 사진 = MBN

빠르게 ‘중국화’ 되는 홍콩…홍콩인들이 쓰는 말부터 바뀌고 있다

많은 사람이 “홍콩은 중국화 됐다”고 얘기를 한다.

어떤 부분에서 그럴까? 홍콩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니 문득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몰 <하버시티>에 들러서 서너 곳의 매장을 들어가 봤다. 손님이 들어오면 점원들은 어김없이 중국 본토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話)로 말을 걸었다. 베이징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들을 만큼 발음이나 억양도 완벽했다. 하지만, 점원들끼리는 홍콩인들이 주로 쓰는 광둥화(廣東話)로 대화를 한다.

홍콩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홍콩섬과 빅토리아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빅토리아피크의 전망대 매표소 직원 역시 나에게 푸퉁화로 가격을 알려줬다. 내가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하자 두 번째로 나온 말은 영어였다. 하지만, 표를 사고 돌아서는 내 등 뒤로는 역시나 점원들끼리 광둥화 특유의 리듬감 있는 말로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가 2017년 여름에 홍콩 여행을 왔을 때 들리는 말은 대부분 광둥화였고, 기자는 골목길 작은 구멍가게 주인에게도 영어로 물어보고 영어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홍콩은 이제 광둥화는 홍콩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만 쓰도록 꼭꼭 숨겨놓은 느낌이다. 1997년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은 뒤 25년이 지나는 동안 중국 정부가 홍콩이 본토와의 동질감을 쌓기 위해 노력했던 결과가 이것일까.

홍콩 거리를 걷다 보면 번호판이 여러 개인 자동차들이 자주 눈에 띈다. 위쪽 노란색은 홍콩 번호판이고, 아래쪽 검정색 번호판은 홍콩과 맞닿은 중국 선전시를 통행할 수 있는 번호판이다. / 사진 = MBN

홍콩의 골목골목은 여전히 외국 사람들로 북적였다. 코로나19로 3년 동안 꼭꼭 닫혀 있던 이 도시가 다시 문을 열자 과거 홍콩에서의 추억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든 듯하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서양이 뒤섞인, 아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꼽혔던 홍콩. 이제는 그 명성이 많이 퇴색됐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홍콩은 나에게 “오랜만에 또 가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일 저녁 무렵 홍콩의 한 식당이 외국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홍콩은 여전히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국제도시임이 분명하다. / 사진 = MBN


[윤석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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