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애’를 데뷔시키는 법[K팝 머글의 덕후 도전기]
흔히 ‘덕질 DNA는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타고난 기질에 따라 덕질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뉜다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덕후’와 ‘머글’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릅니다. 머글에게 덕후의 언어는 마치 외국어 같습니다. 수시로 진화를 거듭하는 K팝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콘텐츠 소비의 개인화가 심화하면서 이 간극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덕후 DNA가 없더라도 ‘학습’은 할 수 있습니다. ‘K팝 머글의 덕후 도전기’는 이 간극을 줄여보는 코너입니다. K팝 세계의 트렌드와 토막 상식을 전합니다. 덕후는 못 되어도, ‘좀 아는’ 머글은 될 수 있습니다.
※머글 :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유래한 단어로 마법사가 아닌 보통의 인간을 가리킨다. 현재는 특정 분야를 깊이 파는 ‘덕후’(오타쿠)의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지하철 2·9호선 종합운동장역에서 잠실실내체육관으로 향하는 길목이 스타를 기다리는 팬들로 북적거렸다. 주로 10~20대 여성인 이들은 응원하는 이의 이름이 적힌 깃발과 슬로건을 배부하거나 포토카드를 나눴다. 가로등에는 ‘나의 왕관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쓴다’는 문구와 스타 얼굴이 그려진 응원의 배너가 펄럭거렸다.
여느 인기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장 앞 풍경 같은 이곳은 엠넷(Mnet)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이즈 플래닛>의 파이널 생방송 무대 현장. 지난 2월 시작된 방송의 마지막 날인 이날 9인조 보이그룹의 탄생을 보기 위해 모인 팬들은 5700명에 달했다. 연습생 98명이 참가한 서바이벌에서 3차례 순위 발표식을 거쳐 파이널까지 연습생 18명이 남았다.
체육관 밖의 열기는 생방송 약 2시간 전인 오후 7시부터 실내로 옮겨졌다. 아직 데뷔도 전인 ‘연습생’들을 응원하기 위해 팬들은 야광봉, 플래카드 등 ‘아이돌 콘서트 필수품’을 챙겼다. 함성 소리 또한 인기 아이돌 콘서트 못지 않았다. 팬들은 생방송 중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진행된 글로벌 투표에도 일제히 참여했다. 최종 데뷔조는 지난 13~20일 진행된 1차 투표와 2차(생방송) 투표 수를 합산해 정해졌다.
이날 막을 내린 <보이즈 플래닛>을 비롯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는 여전히 뜨겁다. 개별 연습생이 아닌 ‘팀전’으로 차별화 했던 JTBC의 <피크 타임>은 지난 19일 화제 속에 막을 내렸으며 MBC에서는 <소년 판타지>가 지난달 30일부터 방영되고 있다. 서바이벌이 연중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팬들의 응원 방법도 진화한다. 내 ‘최애’(가장 좋아하는 스타)의 데뷔를 위해 시간, 에너지, 돈 등 가용 자원을 총동원한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역시 ‘영업’이다. 내 최애의 매력 포인트를 열심히 알려 투표를 독려하는 것이다. 친구, 가족, 지인 등 인맥을 가리지 않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운영하면서 최애가 데뷔해야 하는 이유를 어필한다.
‘투표 교환’도 흔하게 이뤄진다. 다른 연습생을 지지하는 팬과 표를 하나 또는 그 이상씩 맞교환하는 것이다. 방송 초~중기에는 시청자 1명이 여러 연습생에게 동시에 표를 던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통상 프로그램이 후기를 향해 달려갈수록 뽑을 수 있는 연습생 숫자가 줄어들어 교환 또한 어려워진다. 내가 꼭 데뷔시키고 싶은 한 명(원픽)에게만 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이르면 ‘투표 이벤트’가 시작된다. 팬들은 나의 최애를 데뷔시키기 위해서라면 지갑도 아낌없이 연다. 투표 이벤트는 각 연습생의 팬들이 일정액을 모금하고, 이 돈으로 갖가지 경품을 내걸어 팬이 아닌 일반 시청자들에게 투표를 유도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 내에 특정한 연습생에게 표를 던졌다는 인증을 하면 추첨 등을 통해 경품을 증정한다.
내걸린 경품은 막대사탕이나 커피, 치킨 같은 음식 기프티콘부터 노트북, 스마트 워치 등 고가의 전자 제품까지 다양하다. 프랑스 파리 여행권과 같이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경품도 있다. 팬덤의 규모가 클수록 모금액과 경품 규모가 커지고, 득표 기회도 많아진다.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경품을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는 이들의 후기가 잇따라 올라온다.
이같은 투표 이벤트 문화에 대한 의견은 팬들 사이에서도 엇갈린다. 한 보이 그룹의 팬인 A씨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보이 그룹의 팬인 B씨는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그리 건강하지 않은 문화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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