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주의 저격수 된 공화 잠룡들… ‘안티 워크’로 지지층 결집 [세계는 지금]

이예림 2023. 4. 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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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 뒤흔드는 ‘워크’
1930년대 인권 운동 때 처음 언급
보수층선 PC주의자 비하 때 사용
트럼프 당선 때도 반PC정책 한몫
인종적 다양성 적극 담는 ‘디즈니’
디샌티스 주지사 “워크 빠져” 비판
“깨어있다 들으면 모욕적 기분 느껴”
보수계층 60%가 부정적으로 인식
테러·전염병 등 영향 ‘우향우’ 바람
“위협 느껴지면 강력한 지도자 원해”
유럽서도 “워크와 전쟁해야” 시끌

2024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항마로 떠오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지난해부터 세계적인 콘텐츠그룹 월트디즈니와 ‘전쟁’ 중이다. 디즈니가 ‘워크(woke)’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주 정부가 올랜도에 있는 세계 최대 테마파크 디즈니월드에 대한 행정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한 것.

이는 사실상 대선을 염두에 둔 행보로 풀이된다. 공화당 대선 주자들에게 ‘안티 워크(anti-woke)’는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한 매력적인 구호다. 1930년대 미국 인권 운동에서 처음 언급된 워크는 우리말로 ‘깨어있음’을 뜻하지만, 미국 보수층에선 이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에 빠진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워크를 입에 올리는 보수 정치인은 디샌티스뿐만이 아니다. 2020년대 미국 보수층의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 워크가 전 세계 이목이 집중하는 미 대선을 뒤흔들고 있다.
론 디샌티스(왼쪽부터), 마이크 펜스, 니키 헤일리, 비벡 라마스와미.
◆보수의 정치 키워드 ‘워크’

디샌티스 주지사가 디즈니를 워크라고 단정한 건 이 기업이 지난해 3월 5∼9세 아이들에게 학교가 동성애 등 성 정체성에 대해 교육하는 걸 금지하는 일명 ‘게이라고 말하지 말아라(Don’t say gay)’ 법안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PC주의를 표방하며 자사 콘텐츠에 인종적 다양성 등을 적극적으로 담는 기업이기도 하다. 보수 정치인에게는 논쟁을 벌이기에 안성맞춤인 먹잇감이다. 공화당 잠룡이 지금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인 워크를 두고 미키 마우스 왕국과 싸우며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이유다.

아예 워크에 대해 책을 쓴 공화당 대선 주자도 있다. 바이오기업 로이반트 사이언스를 창업해 백만장자가 된 비벡 라마스와미는 2021년 ‘워크 주식회사(Woke Inc)’를 펴내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책은 워크에 빠진 기업들이 인종, 성별, 성적 지향에 지나치게 집착해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라마스와미는 2월 공화당 경선 도전을 선언했다.

니키 헤일리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도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미국은 워크에 빠진 나라가 아니라 강하고 자랑스러운 곳”이라고 적었다.

이처럼 적어도 미국 보수 정치계에서 워크는 지금 가장 유행하는 정치적 수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워크라는 단어는 이미 한 번 미국 대선 무대를 뒤흔든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때다.

그는 1930년대 흑인 인권 운동 노래인 ‘스코츠보로 보이즈’에서 유래된 워크를 2015년 대선 무대에 끌어들였다. 그는 공화당 경선 후보로 출마를 선언하며 “미국 엘리트들의 PC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는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PC라고 생각한다”며 “이것을 위해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국 내 PC에 반감을 갖고 있던 보수층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반PC 정책에 열광했고, 안티 워크 열풍은 그의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성추행 입막음 의혹으로 지난 4일 뉴욕 맨해튼지검에 출석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지지자들이 ‘낫 워크(not woke)’를 외친 까닭이다.
◆중도까지 확장한 안티 워크

중도층까지 이런 움직임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 보수 정치가 안티 워크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요인이다. 지난달 USA투데이와 입소스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깨어있다고 말한다면 어떤 기분을 느끼겠는가”라는 질문에 보수계층은 무려 60%가 모욕적이라고 답했다. 중도층에서도 모욕적이라 답한 대답이 40%로 “칭찬이라고 느낀다”고 대답한 32%를 앞섰다.

안티 워크의 영향력은 어떻게 중도까지 확장됐을까. 미국 시사잡지 디애틀랜틱은 미네소타주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촉발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과 함께 미국 사회 내 인종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진 게 결정적인 이유라고 분석했다.

문화예술계의 PC 열풍에 대한 반감도 컸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와 디즈니는 작품에 흑인 배우를 무조건 캐스팅하고 성소수자 배역을 늘리며 다양성을 꾀했다. 이를 두고 과도한 PC주의라 인식하며 누적된 피로감이 보수층은 물론 중도층까지 확산돼 워크에 대한 조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공화당 소속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워크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로 변했다”며 “교육, 저널리즘, 할리우드, 스포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워크는 통일된 견해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실제 WP가 미국 폭스뉴스에서 워크가 언급된 횟수를 분석해본 결과, 2021년 직전 연도 대비 4배 가까이 사용량이 늘었다.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대중이 더 많은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에 한몫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의 미셸 겔펀드 심리학 교수는 워크를 매개체로 미국 내 우향우 바람이 부는 것과 관련해 “사람은 위협을 감지하면 생존을 위해 강력한 규칙과 지도자를 원한다”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 인구 과잉, 전염병, 자연재해와 관련된 잘못된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이 좀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고 밝혔다.

코넬대 심리학 교수인 로라 니에미의 연구에 따르면 극우라 응답한 47%가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데 동의한 반면 반대편에선 19%만 찬성했다. 니에미 교수는 보수주의자는 위협이 커진다고 느낄수록 집단과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가치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설명했다.
◆유럽도 워크로 ‘시끌’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황이다. LA(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 결과로 50개 주 중 최소 39개 주의 주지사와 상하원 의회가 모두 같은 정당 소속인데, 이는 70년 만의 최고치라고 전했다.

공화당 소속 팻 매크로리 노스캐롤라이나 전 주지사는 “텍사스에서는 보수적인 주지사가 우리끼리 할 일을 하고 있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진보적인 주지사가 우리끼리 할 일을 하고 싶어한다”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스는 공화당이 워크와 전쟁을 선포하며 사회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지난 3월 논평하기도 했다. 우파의 언어가 공공연하게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지지자를 이끌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워크는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도 2021년을 기점으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정체성에 집착하는 미국 모델을 모방하지 않고 다민족 민족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독자적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워크의 단호한 비판자다.

장미셸 블랑케르 프랑스 전 교육부 장관은 미국 대학에서 퍼져나가는 워크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0년대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며 PC문화를 처음 접했다는 그는 여성과 소수 집단을 다르거나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평등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사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정반대가 나타난다”며 워크를 우려했다.

특히 프랑스에선 워크가 정체성 정치라 불리며 격렬한 토론의 주제로 떠올랐다. 정체성 정치는 젠더, 인종,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프랑스는 인종 구분에 따른 판단을 지양하는 ‘인종불문주의’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워크가 오히려 프랑스 내 인종주의를 끄집어내고 있다는 게 주류의 평가라고 디애틀랜틱은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프랑스 브장송시가 복원한 빅토르 위고 동상이 흑인처럼 보인다며 흰색 페인트칠을 하는 테러가 벌어진 게 대표적이다. 당시 안느 비뇨 브장송 시장은 “프랑스에서 인종과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무기화된 것이 뼈아프다”고 말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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