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이든 69시간이든 한가할 때도 바쁜 사람들

김다린 기자 2023. 4. 2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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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리즈] 근로시간 개편 탁상공론➋
역풍 맞은 尹 근로시간 개편안
시점만 미뤄졌을 뿐 수순의 문제
단초 제공한 IT 산업 변화 불가피
대기업 괜찮지만 중소기업은 문제
IT노동 끝단 SI업체 위기 노출
포괄근로제‧프리랜서 계약 걸림돌
구로의 등대 다시 밝혀진다면…

# 정부가 1주 최대 12시간으로 정해진 연장근로 시간을 월과 분기, 반기, 연 단위로 통합해 운영할 수 있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추진 중입니다. 현행 주 52시간 근무제를 유연화해 일이 많을 때는 몰아서 일하고 여유가 있을 땐 푹 쉴 수 있게 한다는 취지입니다.

# 그런데 이를 적용하면 1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론화하면서 극심한 반대 여론에 직면한 상황입니다. 특히 초장시간 노동으로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던 IT 산업 노동자를 향한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視리즈' 근로시간 개편 탁상공론, 두번째 편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정부는 주당 최대 69시간 근로를 터주는 '근로시간 개편방안'을 추진 중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부가 내세운 근로시간 개편안은 당장 이뤄지긴 어렵습니다. 여론의 반발이 너무 심해 "기한에 구애받지 않고 당분간 의견 수렴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자신들의 주장을 접은 건 아닙니다. 스포트라이트가 69시간 노동에만 맞추면서 '숫자의 프레임'에 갇혔다면서 불만을 내비칩니다. 그럼 정부 입장에서 이번 개편안을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볼까요?

정부가 주장하는 개편안의 본질은 69시간 근로가 아닙니다. 핵심은 노동시간의 선택권을 넓히겠다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주 69시간을 일했다면 그만큼의 휴가를 보상받아 주3일 근무가 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생각입니다.

아울러 정부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놨습니다. '근로일간 11시간 연속휴식 부여' '4주 평균 64시간 이내 근로 준수' '관리단위에 비례해 연장근로 총량 감축' 등입니다.

특히 연장근로 총량 감축은 전체로 따지면 근로시간을 줄이는 일이라 노동자에게 더 이득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가령 연장근로시간을 연 단위로 관리한다면 12개월어치의 70%만큼의 연장근로시간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계속 일을 몰아서 하면 과로할 수 있으니, 노동자의 부담을 덜겠다는 겁니다. 정부의 설명을 요약하면 등대가 다시 켜질 순 있지만, 그 등대가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진 않을 거라는 겁니다.

이 때문에 여론의 반대에도 정부는 근로시간 개편안은 꼭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의견은 충분히 듣되,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현재의 '주'에서 '월ㆍ분기ㆍ반기ㆍ연'으로 확대해 일이 몰릴 때 주 52시간 이상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를 종합해 보면 시행 시점만 미뤄졌을 뿐, 정부의 계획대로 제도가 개편될 공산이 크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근로시간 제도를 손보고 등대가 다시 켜지더라도, IT산업 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까요. 현장에선 이런 말이 나옵니다. "IT산업 노동자의 절반만 안전할 것이다." 무슨 얘기일까요?

먼저 내로라하는 IT 대기업의 상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판교를 대표하는 네이버, 카카오, 넥슨, 스마일게이트, 네오플, 한글과컴퓨터 등엔 노조가 있고, 여기엔 상당수 직원이 가입해 있습니다. 최근엔 엔씨소프트도 이 대열에 합류했죠.

한 대형 게임사 관계자는 "신작 출시일을 맞추기 위해 연장근로시간 기준을 광범위하게 잡으려 해도 사용자와 노동자의 합의가 필요한 일이라 노조를 설득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 "몇 년 사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개발자 인건비를 고려하면 기업 입장에선 보상과 휴가를 더 줘야 하는 추가 근무를 시키는 일도 적지 않은 부담일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기업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설명대로 특정한 시기에 장기간 일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휴식과 보상을 챙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휴가ㆍ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환경도 이미 어느 정도 조성된 터여서 노동자들이 '공짜 야근'에 시달릴 일도 적을 겁니다. 노조 가입률이 높은 덕분에 경영진이 개편안을 입맛대로 활용할 경우 대응하기도 쉬울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름값이 높은 IT기업을 제외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노조가 없거나 규모가 작은 IT 기업들은 주 52시간제 아래에서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 때문인지 규모가 작은 IT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 사이에선 '말만 선택일 뿐, 사실상 주 69시간 노동이 강제될 것'이란 우려가 나돌고 있습니다.

특히 걱정스러운 분야는 시스템통합(SIㆍ System Integration) 업계입니다. SI업체는 직접 서비스를 개발하는 네이버, 카카오 등과 달리 다른 회사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개발하는 회사입니다. 주로 일감을 외주로 받아 기획ㆍ설계ㆍ유지보수 업무를 담당합니다.

가령, 은행에서 새로운 앱 서비스를 준비할 때 개발자를 고용하는 게 아니라 SI업체에 일을 맡기는 식이죠. 직접 고용하지 않고 하청을 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저렴하게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SI업체의 개발자는 국내 IT산업 노동자의 절반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이들 SI업체 노동자 대부분이 포괄임금계약을 맺고 있다는 겁니다. 52시간이든 69시간이든 포괄임금제 아래에선 보상 없는 초과근무가 불가피합니다. 정부는 포괄임금제도 역시 함께 손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그 온기가 하청업체인 SI 개발업계에도 미칠지는 미지수입니다.

14년차 SI 개발자 최유현(가명ㆍ38)씨는 SI 개발자 현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씨는 그간 정부 지방재정관리시스템이나 대기업 서비스 개발 등 20여개의 프로젝트를 담당해 온 베테랑 개발자입니다.

"하청에서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마감이 촉박해지고 요청이 더해져 마지막엔 상상도 못 할 업무량을 받아 듭니다. 어떤 주에 바짝 일하면 다른 주엔 좀 쉬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기 어렵죠. '전주에 60시간 넘게 일했으니, 이번 주는 4시에 퇴근하겠습니다', 이런 한가한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란 겁니다. 현행 주 52시간 상한 규제도 적용되지 않는 포괄임금제도 아래에선 어떤 개편안도 무의미합니다. 더구나 SI 시장은 바쁠 땐 바쁘고, 한가할 땐 한가한 시간으로 나뉘지도 않습니다.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와 근로계약이 진행되다 보니 해당 과업을 완료할 때까진 계속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최씨는 주 52시간의 기준을 확대하는 게 사업주의 인식을 바꿔놓을 것이라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래도 주 52시간을 시행할 땐 초과노동은 제재 대상이라는 사업주의 인식이 생겼고 52시간을 넘게 일을 시키면 눈치라도 봤는데, 주 69시간으로 바뀌면 이런 인식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가요. 정부는 자신들의 설명대로 구로와 판교의 등댓불을 안전하게 켤 수 있을까요. 글쎄요, 현장에선 퍽 회의적인 반응을 보내는 듯합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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