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영광 누린 영화감독, 마약중독 애인에게 바랐던 것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4. 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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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76]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60대의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아픔을 느꼈다. 4년 전엔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2년 전엔 척추 융합 수술을 받았다. 그 어느 것에서도 회복되지 못했다.

성공한 영화감독인 그는 수백만명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지금은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릴 수 없다. 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서 있다가 앉을 때는 몸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무릎에 베개를 받쳤는데, 이 역시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남겼다.

신작 아이디어가 떠올라 열심히 쓸 때도 있었지만,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노트북엔 미공개 작품만 쌓였다. 종착지를 앞둔 승객처럼 그는 인생에서 하차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영화감독으로 탄탄대로를 걸어온 살바도르 말로는 몸의 쇠약해짐에 좌절한다. 두문불출한 채 옛일을 회상할 뿐이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페인 앤 글로리’(2019)는 고통과 영광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감독인 주인공은 데뷔작부터 주목받으며 온갖 영광을 누려왔지만, 이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쓰라림이 가득하다.

젊은 시절을 지나버린 인생은 단지 구색을 맞춰두기 위해 붙여둔, 재미없는 부록 같은 것일까. 몸은 쇠약해지고, 사랑했던 이들은 하나둘 떠나는 고통의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고통을 줄이기 위해 수영하던 그는 어린 시절 냇가에서 빨래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저택에 사는 성공한 감독, 동굴같은 집에 살던 시절을 추억하다
영화는 살바도르가 본인 저택에서 수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깔끔하게 마감된 타일, 수영장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은 살바도르가 이룬 부를 상징한다. 그는 팔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저 물밑에 잠겨 있다. 그의 수영은 몸매를 관리하기 위한 차원이 아닌 척추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 아래에서 그는 곧장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접속된다. 살바도르가 회상하는 빈궁한 시절에 어머니는 냇가에서 세탁물을 빨았다. 저택에서의 수영과 여러 요소가 대조된다. 그곳엔 인공조명 대신 햇살이 비췄다. 지금은 저택의 넓은 수영장에서 쓸쓸하게 수영하고 있다면, 그때는 빨래터에 나온 이웃 아주머니들이 살바도르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4년 전 본인 곁을 떠난 어머니가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살바도르를 데리고 이리저리 이사 다녀야 하는 신세를 한탄한다. 정작 아들은 기차역이 좋다며 즐거워한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너무나도 가난한 시절이었다. 돈이 없던 부모는 그를 데리고 주방에 천장도 덮이지 않은 집으로 이사했다. 철없던 시절의 그는 동굴 같은 집에서 살게 된 것이 신났다. 지금은 미술관 같은 집에서 살지만 도무지 신이 나지 않는다.
옥상에 위치한 새집을 본 세 사람의 표정이 엇갈린다. 아버지 얼굴에선 아내와 아들을 향한 미안함이, 어머니 얼굴에선 이곳에서 생계를 헤쳐 나갈 것에 대한 막막함이 비친다. 동굴 같은 곳에서 살게 됐다며 신나 하는 아들의 표정만 밝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내 사랑으로 연인이 마약 중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처럼 영화는 고통 속에서 기쁨이 피어나고, 기쁨이 다시 좌절로 이어지는 모순된 순간을 번갈아 조명한다.

실패한 사랑의 추억도 그렇다. 청년기에 그는 연인과 장기간 여행했던 기억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가득한 시간이었으나 연인은 마약에 중독돼 그를 괴롭게 했다. 살바도르가 평생 쓸 영화적 영감을 마드리드 여행에서 얻고 다니는 동안, 연인은 침대에 누워서 신음했다. 성심성의껏 돌보면 연인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이렇게 돌아본다. “나는 사랑이 그의 중독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산을 움직일 수 있을지언정 사랑하는 이를 구원하기에는 부족했다.”

“사랑은 산을 움직일 수 있을지언정 사랑하는 이를 구원하기에는 부족했다.” 영화는 문학적 대사로 마음을 움직인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그는 이때의 이야기를 연극 ‘중독’으로 올린다. 실패한 사랑의 부끄러운 고백이기에 자신의 이름은 철저히 가린 채 익명으로 올린다. 그러나 극에서 아무리 실제의 인명과 지명을 가려도 한 사람에게만큼은 익명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연극을 본 옛 연인이 살바도르에게 찾아온 것이다. 서로의 새로운 삶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다 옛 연인이 묻는다. “나를 돌봐주면서 작가와 감독으로서 더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가벼워졌어. 정말 그렇게 느꼈어?”

살바도르가 답한다. “네가 방해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오히려 반대지. 너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채우지 못했던 내 삶을 채워줬어.”

한밤 중 그에게 옛 연인이 찾아온다. 집 앞에서 전화를 걸면서도 집 앞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 이를 발견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배려가 애틋하다. 이미 중장년인 그들은 여전히 소년처럼 감정을 나눈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광엔 늘 고통이 함께하고, 고통 속에서도 영광이 싹튼다
살바도르는 이날 만남을 계기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는다. 한동안 중독돼 있던 마약을 변기에 버리고, 멈췄던 척추 통증 치료를 받는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찍는다. 각각 회복되지 않는다며 묻어뒀던 고통을 작품으로 만든다. 영광으로 승화시킨다.
살바도르는 32년 전 ‘맛’이라는 작품을 함께한 뒤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주연 배우(왼쪽)와 재회한다. 그가 너무 무책임하고 방탕하다고 생각해서 만나지 않았으나, 다시 본 뒤 생각을 고치게 된다. 시간은 때로 관계에서의 갈등도 봉합한다.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이야기다. ‘나쁜 교육’ ‘귀향’ ‘브로큰 임브레이스’ 등을 통해 사랑받아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색채의 감각적 사용,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마술적 연출을 보여 준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짚는 문학적 대사가 마음을 흔든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 ‘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 [사진 제공=제이앤씨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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