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도매가 공개’ 동상이몽… “가격 인하” vs “줄폐업” [이슈 속으로]

김범수 2023. 4. 2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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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기준 전국 주유소 수는 1만1140곳
연평균 1.16%↓… 매년 148곳 폐업한 셈
‘전기차 증가·가격 경쟁 심화’ 원인 작용
주유소協 “공개범위 확대 경영 악화 가중”
정부 ‘석유 및 대체연료사업법’ 개정 추진
정유사 지역 판매가격 공개 등 주요 골자
정유업계 “정부, 기업 경쟁력 보호 역행”
“고유가 때 이익으로만 재단” 볼멘소리도
업계 “가격 차이 ℓ당 30원 수준 불과한데
40∼100원 가까이 싸게 공급 받아” 지적
수도권 낮은 가격 탄력성 지적 목소리도

서울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A씨는 몇년 전부터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 1년 중 하루도 쉬지 않고 운영해도 영업이익률은 1% 이하다. 손님이 뜸한 야간에 운영하면 추가 인건비까지 발생해 남는 돈이 아예 없을 정도다.

‘주유소 한 곳만 운영해도 알부자’란 소리는 옛말이다. 지방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경기 파주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B씨는 적자에 시달린 나머지 지난해 폐업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B씨는 “토지 정화 비용 등 폐업 비용만 1억원 넘게 든다”며 “주유소 운영권을 넘기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벼랑 끝 주유소…“도매가 공개 땐 폐업 도미노”

20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전국 주유소 수는 1만1140곳으로 최근 11년간 연평균 1.16%씩 감소했다. 매년 주유소 148곳이 폐업한 꼴이다.

전국 주유소 수는 2010년 1만3004곳으로 정점을 기록한 뒤 2013년 1만2687개, 2017년 1만2007개, 2020년 1만1589개, 2022년 1만1144개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주유소 감소 현상의 원인은 전기차 등 친환경차량의 증가로 수요가 줄어든 데다가 주유소 간 가격 경쟁이 커지면서 이를 버티지 못한 것 등이 꼽힌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휘발유 등 석유제품 도매가격을 공개하는 범위를 확대하면 가격 출혈경쟁이 더 심해져 주유소 줄폐업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유소협회 관계자는 “국내 주유소의 경영 악화는 심각한 사회문제”라며 “정부가 도매가격 공개로 결정하면 일반 주유소들은 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출혈 경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휘발유 도매가 공개…정부vs업계 ‘평행선’

정부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개정안은 기존 정유사들이 전국 평균 판매가격을 공개하고, 전국 판매량·매출액·매출단가를 보고했던 자료 범위를 정유사·지역별 판매량·매출액·매출단가, 정유사·전체 판매 대상별(일반대리점·주유소 포함) 평균 판매 가격, 정유사가 주유소에 판매한 지역별 평균 판매가격 등으로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는 정유 가격 공개 범위를 확대하면 시장 모니터링이 강화되고, 정유사 간 가격 경쟁이 촉진돼 전체 기름값이 인하하는 효과가 있다는 입장이다. 석유가격 공개 범위 확대는 이명박정부 당시인 2009년 한 차례 논의됐지만 정유사들 반발로 2011년 무산됐다.

지난해 정유사들은 전 세계적인 고유가 기조로 정제마진을 통한 역대급 실적을 기록하고, 1000%가 넘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정부의 정유 가격 공개 방침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정유사와 주유소 업계의 반발 등으로 시행령 심의는 예정된 2월 24일에 결론내리지 못했다. 3월 10일과 24일에 각각 열릴 예정이던 재심의 일정마저도 미뤄지게 됐다.

정유업계는 정유부문 영업이익률이 2%에 불과한 상황에서 가격 공개 범위 확대를 통해 영업이익을 더 낮출 여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2007년부터 지난해 3분기까지 국내 정유사의 정유부문 평균 영업이익률은 2.0%로 나타났다. 저유가 기조가 강했던 2012년부터 2021년까지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0%다. 같은 기간 국내 40대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 6.3%에 비하면 턱 없이 낮다.

정유업계 측은 휘발유 등 석유 도매가 공개범위가 확대되면 정유사 간 발생하는 출혈경쟁에 비해 석유 가격이 내려가는 효과는 미비하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영업비밀과 기업전략이 노출돼 국가 경쟁력도 악화된다는 입장이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의 영업이익률은 전 세계 정유사에 비교하면 은행 예금이자보다 낮은 수준”이라며 “국내 정유사가 산유국의 정유 기업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번 개정안은 이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횡재세’ 논란의 정유사…올해 전망은

정부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휘발유 등 석유제품 도매가격을 공개하는 범위를 확대하자는 입장이다. 지난해 고유가 기조로 국내 정유사들이 역대급 실적을 거두면서 ‘횡재세’ 논란이 커진 상황도 이번 정책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석유 도매가 공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되도록 빨리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정유업계는 “아직 국제유가가 하락하지 않았지만, 복합 정제마진은 떨어지고 있어 향후 수익성 악화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18일 기준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이 배럴당 3달러대로 하락했다. 지난해 6월 배럴당 30달러까지 치솟았던 정제마진이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다. 정제마진은 국내 정유사의 실적을 가늠하는 지표다.

SK이노베이션의 올 1분기 예상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8조1732억원, 2941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1.7%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82.1% 급감할 것이란 관측이다. 에쓰오일 1분기 영업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55.9% 낮은 5870억원으로 추산됐다. HD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 역시 비슷한 수준의 영업이익 하락이 예상된다. 이는 정유 4사 영업이익 합산이 총 15조원에 이르렀던 지난해 상황과는 다른 분위기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세금을 제외한 국내 정유사의 휘발유 가격은 1ℓ당 669.6원으로 OECD 국가 평균인 1ℓ당 848.8원보다 낮다”며 “정유사는 저유가 기조 때 손실이 난 부분을 고유가 기조 때 발생한 이익으로 메꾸면서 2%대의 영업이익률이 나는 구조인데, 고유가 때의 이익으로만 재단하려는 면이 있어 억울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현재 적용 중인 유류세 인하 조치를 8월 말까지 4개월 더 연장하기로 한 지난 18일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 연합뉴스
◆알뜰주유소 논란 재점화… “기울어진 운동장”

주유소 업계가 휘발유 등 석유제품 도매가격을 공개하는 범위를 확대하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 시행령 개정안’ 이외에 알뜰주유소 정책 폐지를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도매가 공개 조치와 알뜰주유소 정책이 맞물리면 정유사 이름을 달고 영업하는 주유소는 설 곳이 없다는 주장이다.

20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사이트 ‘오피넷’ 등에 따르면 일반 주유소와 알뜰주유소의 보통 휘발유 판매가 차이는 1ℓ당 평균 30원 수준이다. 경유 평균가 차이는 27원 남짓이다.

알뜰주유소가 일반 주유소와 석유제품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데도, 석유공사 등으로부터 1ℓ당 최소 40~100원 가까이 싸게 공급받는 혜택으로 큰 수익을 거둔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특히 고유가 상황에서 소비자들이 1원이라도 싼 주유소를 찾는 만큼, 일반 주유소들은 은행 이자보다 낮은 영업이익률을 더 낮추면서까지 가격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는 게 업계 입장이다.

알뜰주유소의 영업환경이 일반 주유소보다 낫다는 것을 입증하듯 알뜰주유소 수는 2012년 844개에서 지난해 1303개로 상승세다. 같은 기간 일반 주유소 수가 1만2803개에서 1만954개로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서울에 위치한 주유소의 경우 높은 임대료 등 많은 비용이 발생해 가격 탄력성이 낮은 것과 달리 지방에 위치한 주유소의 경우 석유 가격에 수요가 탄력적이다 보니 알뜰주유소와의 경쟁에서 크게 밀리는 상황이다.

정부가 알뜰주유소 숫자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일반 주유소의 알뜰주유소 전환이 쉬운 것도 아니다. 이에 주유소 종사자들은 17일부터 알뜰주유소 정책을 철회해 줄 것을 요구하며 용산 대통령실,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울산 한국석유공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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