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 같은 도자…아무 것도 없는 듯 모든 것을 담았다 [어떤 울림]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아무 것도 없는 하얀 캔버스가 벽에 걸렸다. 미니멀리즘 작가의 작업인가 싶어 가까이 보니 캔버스가 아니다. 도자기다. 네모난 형태의 하얀 도자. 작품 명은 ‘빈 종이(Blank Paper)’다. 도자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 류젠화(Liu Jianhua·61)의 작업이다.
페이스갤러리 서울은 류젠화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중국 도자공예의 전통을 이어가며 동시대 미술 흐름 속에서 도자의 확장성을 고민하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 작업들이 선보인다.
텅빈 사각의 도자가 말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깨끗하게 비웠는데도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제작엔 나의 노동과 긴 시간이 들어간다. 작업하는 순간 순간 느꼈던 감정이 다 담겨있다”고 설명한다.
도자는 매트한 질감이다.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면 흙을 얇게 펴는 과정에서 작가의 호흡 조절에 따라 아주 약간의 굴곡이 보인다. 이지러진 지문의 흔적과 밀어낸 자국도 확인할 수 있다. 미묘한 차이가 백색의 그라데이션으로 펼쳐진다.
그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마음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심정으로 보면 좋겠다”며 “그러면 감상자와 작품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마치 작품을 소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객이 작품과 오롯이 만나는 그 순간,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을 ‘소유’라고 표현한다. 구매로 이루어지는 관계 맺음이 아닌 정신적 교류이자 조우의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이처럼 미니멀하고 컨템포러리한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도자기 생산 중심지로 ‘도자기의 수도’로 불리는 경덕진에서 1977년부터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고령토 장인이자 공장장이던 삼촌을 따라 전통 도자기를 배웠다. 1985년엔 경덕진 도자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89년까지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조각 작업에 몰두했다.
작가는 동시대 여느 작가들처럼 ‘85 신사조 미술운동’에 영향을 받아 서방국가의 모더니즘을 수용하고 표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로 전환을 시도한다. 전통적 도자기법에서 탈피해 개인적 서사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개인적 서사가 사회적 주제로 확대한다. 여성 신체 일부가 남성 공무원이 착용한 유니폼(Secrecy·1993-97)을 입고 나타나거나, 치파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성 토루소가 화려한 색상의 소파에 누워있는 작업을 선보인다. 전통과 욕망의 충돌을 도자로 제시하며 자신의 조형 언어를 확장한다.
2000년대엔 정갈한 청백색의 도자 작품을 선보이며 화려한 색상에서 탈피했다. 싱가포르 비엔날레(2006)에선 산업 폐기물로 구성된 대규모 작업을 선보인다. 이후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점점 벗어나 개념적이고 비서사적인 탐구로 바뀐다. 종이 같은 형태의 얇은 백자를 벽에 거는 작품인 ‘빈 종이’ 시리즈도 2009년 처음 시작한다. 잉크가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흔적들(Traces), 강철로 된 판 위에 연못처럼 놓인 황금빛 도자기 사각형(Square)시리즈 연작도 줄이어 탄생한다.
류젠화의 작업은 미학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기술적 완성도도 높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빈 종이 시리즈는 가로 120cm, 세로 200cm에 달하지만 그 두께는 고작 0.7cm에 불과하다. 흙을 얇게 밀어서 말리는 것도 어렵지만, 굽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깨진다. 볼펜으로 자유롭게 낙서한 선을 빚은 듯한 ‘선’(Lines)시리즈도 마찬가지다. 경덕진에서 수 년간 쌓인 내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작업들이다.
그의 작업은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본 전시장의 가장 마지막 섹션 ‘행성의 시간들’과 무각사의 전시장에 각각 걸렸다. 본 전시장의 ‘흔적의 형태’(The Shape of Trace)는 인류 전반에 걸친 역사의 흐름, 인류 문화의 발전을 상징한다. 세계 곳곳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느꼈던 심상을 도자로 표현했다. “역사란 무언가를 창조하고, 다시 뒤덮고 또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전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한 층을 만들고 다시 덮고, 또 만드는 과정을 통해 벽돌처럼 두껍고 울퉁불퉁한 도자를 제작했다.
무각사에서는 검은 도자 거울이 걸렸다. 앞에 서면 어른어른 비치는 형상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빈 종이’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작품과 관객이 맺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이 매트한 흰색이냐 반질거리는 검은색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우환의 관계항과 올라퍼 알리아슨의 태양, 아니쉬 카푸어의 구름, 온 카와라의 날짜 페인팅 시리즈처럼 인식과 개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서울 전시장에서는 4월 29일까지, 광주에서는 7월 9일까지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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