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였던 적이 있었을까…현정은-쉰들러 '엘리베이터 전쟁' 20년

배지윤 기자 2023. 4. 23.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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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2위' 승강기업체 쉰들러, 2003년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분쟁 당시 '우호세력'으로 등장
2대주주 된 뒤 엘리베이터사업 지속 인수 시도…'7년째 적자' 국내 사업 유지하며 경영권 노리는듯
현대엘리베이터 사옥(현대엘리베이터 제공).

(서울=뉴스1) 배지윤 기자 = 2006년 알프레드 엔 쉰들러 쉰들러홀딩스AG 대표가 현정은 회장에게 현대엘리베이터(017800) 지분 매입 사실을 알렸다. 당시 현 회장은 "힘들 때 곁에 있는 이가 진정한 친구"라며 우호관계를 다졌다.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그로부터 4년 뒤,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를 밀어붙이면서 협력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며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 과정에서 체결한 파생상품 계약을 문제삼아 소송이 시작되며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다국적 승강기 기업 '쉰들러홀딩스AG'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상대로 2014년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이 9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 회장은 회사측에 불리한 파생상품 계약으로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내용으로, 최근 대법원 판결에 따라 배상금 1700억원이 확정됐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현대엘리-쉰들러 악연의 시작 두 회사가 처음부터 이런 악연은 아니었다. 2003년 현 회장의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일 당시 현대엘리베이터는 쉰들러에 엘리베이터 사업부를 매각하는 LOI(인수의향서)를 체결했다. 엘리베이터 사업부를 넘기면 현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돕겠다는 제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시 위반으로 정 회장에 지분 매각 명령이 떨어지면서 현 회장의 경영권 리스크도 자연스레 해소됐다. 공정거래법상 쉰들러의 지분 매입이 어렵게 되자 LOI도 파기됐다.

2006년 쉰들러는 KCC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매입하며 단숨에 2대 주주로 올라섰다. 당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쉰들러는 "현 회장을 비롯한 현대엘리베이터의 이사회 및 경영진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며 논란을 일단락시켰다. 쉰들러의 지분 매입 이후 두 회장이 함께 금강산을 찾아 오히려 협력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쉰들러는 이후에도 현대엘리베이터의 엘리베이터 사업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각을 지속 요구했다. 2010년에는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 당시 '현대건설 인수를 도울 테니 승강기 사업을 달라'는 취지의 제안서를 전달했다. 현 회장은 매각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후 2014년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를 위해 금융사들과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체결했다. 문제가 된 부분은 금융사 인수 가격보다 현대상선 주가가 떨어질 경우 손실 보전을 해주겠다는 조항이었다. 해운 경기가 나빠지면서 주가도 연일 추락했고 쉰들러는 이를 문제삼아 현 회장 등을 핵심 경영진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냈다.

그렇게 9년 간 이어진 소송의 대법원 판결이 지난 달 확정됐다. 현 회장에게 배상금 1700억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며 쉰들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 회장은 최근 현대네트워크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자금 마련에 나서 신속하게 배상금을 전액 납부했다.

현재 쉰들러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15.5%다. 현 회장(7.8%) 측 우호 지분은 26.5%로 양측 간 지분율 차이 약 11%p다. 쉰들러는 배상금 확정 후 현 회장 지분을 상대로 강제집행에 나서 추가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가져올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 회장이 배상금을 단시간에 완납하며 이 시나리오는 불발됐다.

다만 오랜 악연이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다고 볼 수 없다. 여전히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다. 주주대표소송은 끝났지만 언제든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주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 News1 양혜림 디자이너

◇글로벌 2위 승강기 기업 쉰들러…韓 포기 못하는 이유

쉰들러홀딩스AG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엘리베이터 업체다. 2003년 중앙엘리베이터를 흡수합병해 국내 법인 쉰들러엘리베이터를 세운 뒤 한국에서 승강기 사업을 하고 있다.

다만 글로벌 2위 엘리베이터 업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국내에서는 고전하고 있다. 국내 승강기 시장에서 현대엘리베이터의 점유율은 40% 안팎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이어 티케이헬리베이터와 오티스엘리베이터가 각각 22%, 17% 점유율로 '3강' 체제를 이룬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매출 2조1293억원, 영업이익 430억원으로 견조한 실적을 거두고 있다. 이 가운데 엘리베이터 사업부(승강기·승강기 유지보수) 매출은 1조9296억원에 이른다.

반면 쉰들러엘리베이터는 2015년 3억원가량 영업이익을 기록한 뒤 2016년부터 7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 매출은 578억원, 영업손실은 37억원 규모다. '부분 자본잠식' 상태로 재무상태도 좋지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해 50억원, 2020년 7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어려운 영업환경에도 국내 사업을 지속하는 것은 4조원에 이르는 한국 승강기 시장의 매력 때문으로 풀이된다. 인구 밀집도가 높아 매년 전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승강기가 새롭게 설치(4만여대)되고, 전국 승강기가 80만대 규모로 세계 7위의 승강기 보유국이어서 유지 보수 시장도 상당한 규모다.

업계 관계자는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는 이유는 결국 한국이 승강기 업계에서 매력적인 시장이란 의미"라며 "한국 시장 성장세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 진출 교두보로 삼는 아시아 거점 역할을 할 수 있어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말했다.

jiyounba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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