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사다리' 전세제도 어쩌다 사기온상이 됐을까[부동산백서]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지금 여론 분위기에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무분별한 전세대출이 시장을 왜곡시켜놓은 측면이 있어요. 이 동네 평범한 원룸 월세가 보증금 500(만원)에 50(만원) 정도 하거든요. 그런데 정부에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장 90%까지 전세자금대출을 해줬단 말이에요. 솔직히 이런저런 방법 동원하면 100%까지 대출이 되거든요. 이자도 얼마 안 하니까, 월 납부액이 50만원보다 적은 거죠. 대출 많이 받아서 전세 들어가면 역세권 신축도 가능하단 말이에요. 그럼 누구나 좀 허름한 500/50 원룸 안 가고, 대출 받아서 신축 들어가려고 하죠. 더 좋은 집을 더 싸게 살고 싶은 심리가 있는 거고. 시장이 왜곡된 겁니다."
작년 말 이른바 '빌라왕'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까치산역 인근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의 말입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지역 개업 중개사들은 나이와 업력을 불문, 하나같이 조직적 전세사기의 원인 중 하나로 무분별한 전세자금대출을 꼽았는데요.
실제로 신축 빌라를 수백 채씩 소유했다가 떨어지는 전세가 차액을 돌려주지 못하고, 수억씩 불어나는 종합부동산세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또는 사망)하는 '건축왕'과 '빌라왕' 등 조직적 전세 사기의 핵심은 대출이었습니다. '이자 지원'을 미끼로 세입자에게 집값보다 높은 전세금을 대출받게 한 겁니다. 세입자는 계약 기간 이자 부담 없이 돈을 모으면서도 신축 빌라에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치솟는 집값 속 자금 여력이 별로 없는 신혼부부와 20~30대 직장인이 주로 피해자가 된 이유입니다.
집주인이 파산 등을 이유로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면(못 하면) 세입자는 전세금과 매매가의 차액만큼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닙니다. 집을 경매 등으로 처분할 경우 조세 우선권에 따라 정부가 체납된 세금을 먼저 거둬 가려 합니다. 임대인이 확정일자 시행 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면 금융기관도 우선권을 갖죠. 서울 강서구 화곡동 오피스텔과 빌라를 무작위로 골라 등기부등본을 떼어 보면 영세 신탁업체에 소유권이 이전된 집도 많습니다. 화곡동과 인천 미추홀구와 경기 화성·구리시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시한폭탄'처럼 터지고 있고 앞으로도 터질 'ㅇㅇ왕' 전세사고의 전말입니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희끗한 등촌역 앞 공인중개사 역시 "옛날에는 전세 산다고 하면 그래도 중산층,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이라고 봤어요. 지금처럼 전세대출을 많이 받지 않았으니까."라며 무분별한 전세대출로 왜곡된 주거 시장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무분별한 전세자금대출"
물론 이전에도 전세 사고는 터졌고, 전세 대출도 있었습니다. 1998년 5월 13일 새벽 6시 30분 부산 영도구에선 40대 주부가 건물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가 있고요, 1999년 9월 1일에는 한미은행(옛 한국씨티은행)이 '최근 전세가 상승에 따라 간편전세자금대출을 연 9.75% 변동금리로 시작했다'는 뉴스도 보이네요. 그런데 이자 부담이 상당해 보입니다. 대출로 전세자금을 조달하는 건 매달 월세를 내는 것보다 팍팍했음을 짐작할 수 있죠.
원래 전세는, 주택금융 차원에선 제도권 금융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사금융'을 통해 주택 구입 자금을 마련한 수단입니다. 집주인은 적은 자기자본으로 자가를 소유하고 가격상승 추세를 활용해 자산을 증식할 수 있고, 세입자는 주택을 사는 것보다 적은 비용으로 일정기간 안정적 거주를 보장받으면서도 월세 부담 없이 자금을 모아 내집마련을 할 수 있었죠.
주거안정 차원에서 전세는 사글세→월세→전세→자가로 이어지는 '주거사다리'에서 가장 안정적인 형태인 자가로 가는 마지막 디딤돌 역할을 해온 겁니다.
그렇다면 전세 제도의 유용성에는 필연적으로 조건이 붙을 수밖에 없는데요. 주택담보대출 등 제도권 금융이 발달할 수록 매력이 떨어지고, 가격상승 추세가 이어지지 못한다면 자산 증식 수단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심지어 이번 빌라 사기 관행처럼 세입자가 주택을 사는 것보다 많은 비용으로 입주해 일정 기간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받지 못하고 전세금을 날리게 생겼다면, 전세 제도는 유용성을 완전히 잃은 거죠.
왜곡된 전세제도는 주택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1990년 8월 부동산 114가 조사한 서울 및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47%였는데요. 점차 제도권 금융 발달과 저금리로 전셋값이 아무리 올라도 대출만 받으면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립니다. 사금융과 제도권 금융이 뒤섞인 가운데 전세가율이 70% 안팎까지 치솟고 '갭(gap) 투자'가 성행하죠. 전세제도가 집값 상승 주범이란 지적을 받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택시장이 왜곡되자 사회 일각에선 전세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전문가들도 전세제도가 이미 유용성을 잃은 만큼 결국 소멸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죠.
한국에만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외국처럼 월세와 매매로만 주택시장을 운용해야 한다는 건 말은 더욱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전세는 한국에만 있었던 제도도 아니며, 그 역사도 상당히 길다는 겁니다.
◇전세, 생각보다 오래·널리 존재했던 제도…쉽게 사라지긴 어려워
일단 우리나라 전세제도의 기원으로 꼽히는 '전당'제도는 고려시대부터 행해졌는데, 중국으로부터 도입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고요. 조선 후기 '가사전당'을 거쳐 현대로 자리잡았다고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초가 3칸 앞뒤의 건과 사랑채 1칸을 60냥에 전당하니, 정월 30일을 기한으로 이를 넘기면 영영 차지하도록 한다'는 계약 문서 기록도 남아있다고 하네요.
서양에서는 기원전 15세기경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대 누지라는 고대 도시에서 점토판에 '안티크레시스(전세)' 형태의 계약 내용이 발견됐다는 연구도 2008년 발표된 바 있습니다. 바빌로니아법에도, 현대 프랑스 나폴레옹법에도 안티크레시스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미국 루이지애나와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전세제도가 존재했던 흔적이 확인된다고 하고요.
유엔해비타트가 2003년 공개한 보고서에는 볼리비아와 인도 일부 지역에서도 보증금을 맡기고 월세 없이 거주한 뒤 보증금을 돌려받는 형태의 주거 방식이 나옵니다.
결국 전세제도는 우리 생각보다 역사가 길고, 세계화에 따라 사라지게 될 한국만의 독특한 임대차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대체안이 없다면 전세가 완전히 사라지긴 어려울 것이라고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논문을 통해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전문가 "금융권 자성도 필요해"
다시 조금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 2월 '최근 전세금이 폭등하면서 전셋집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은행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10년 뒤인 1999년 8월 '서울 및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90년대 들어 최고 수준에 거의 육박하는 등 전세가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진 건데요.
제도권 금융을 통한 전세자금대출이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정책적으로 장려된 서비스라고 해도, 투자보다는 예대마진이 사실상 주요 소득원인 은행의 '이자장사'와 맞물린다면 전세 시장은 왜곡될 수밖에 없겠죠.
요즘 전세는 '집주인한테 월세 내는 대신, 은행에 이자 주는 월세'라고도 불리는 게 현실입니다.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전세사기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김남근 법무법인 위민 변호사는 이번 사태의 재발 방지는 물론 피해자 구제 대책 마련에 있어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만 채근할 게 아니라, 금융위원회와 국세청 등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명의 청년이 목숨을 잃고서야 속도가 붙었다는 점은 아쉽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범정부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 나올 대책의 실효성을 끊임없이 살펴보는 과정도 중요하겠죠.
화곡동 한 중개사가 남긴, 잊을 수 없는 일침으로 글을 마칩니다.
"자금 조달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집을 수백 채씩 소유해 임대를 내놓는데, 공공인 HUG나 국내 최고 전문가 집단인 은행이 정말 몰랐을까요?"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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