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한마디 못하던 이민 가정 소년, 세계토론대회 챔피언이 되다
우연히 들어간 토론팀에서 소통의 매력에 빠져
한국인 최초로 세계토론대회에서 2회 챔피언
하버드 조기 입학해 4년 장학생, 최우등 졸업
책 읽을 때도 저자와 대화하듯 자기생각 메모해
만 여덟살에 부모를 따라 동양인이 거의 없던 호주의 한 도시로 이민 간 소년은 영어를 거의 못해 늘 외로웠다. 서툰 영어로 몇 마디 하면 놀림을 당하거나 싸움으로 번지자 갈등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택했다. 3년 후 담임교사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들어간 교내 토론반은 내성적인 이민 가정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토론대회에 참여했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토론은 무엇인가.
“중·고등학교 토론대회는 토너먼트 방식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야 했고, 대학은 1년에 6∼7회 나갔다. 그 중 열 한살 때 처음 나간 토론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어로 처음 사람들 앞에서 토론한 것인데, 호주 이민 후 처음 진짜 대화를 시작한 느낌이었다. 수줍고 두려워서 아이들 대화에 끼지 못하고 조용히 있다가 처음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표현했던 순간이다. 2016년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 대회도 기억에 남는다.”
━토론을 처음 시작한 서보현과 세계대학생토론대회 때 서보현은 어떻게 달랐나.
“디베이트를 오래하고 챔피언이 됐어도 내성적이고 부끄러운 성격은 그대로다. 제 목소리가 제일 크게 들릴 때 여전히 불편하다. 토론을 통해 다른 사람과 차이를 넘어 대화할 수 있고 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은 똑같다. 또 아무리 수줍고 자신없던 성격도 꾸준한 연습과 토론기술을 통해 자신감 있게 바꿀 수 있다.”
━토론을 시작하고 어떤 변화가 있었나.
“처음엔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아니었는데 자신감이 생기니 성적도 오르고 친구도 잘 사귀게 됐다. 특히 토론을 하면 온 세상을 여행다니는 것 같았다. 미국, 유럽, 아시아 정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지구의 문제 등을 다루면서 넓은 시야를 갖고 글로벌 이슈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당신을 토론세계로 이끈 호주의 토론 교육이 궁금하다.
“호주 교육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다. 사립학교 뿐 아니라 공립학교도 디베이트 팀이 하나씩 있고, 대회도 토너먼트 형식으로 꾸준히 열린다.
제가 토론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한국과 호주를 모두 경험한 저의 성장배경 덕분인 것 같다. 호주에서 배운 토론 문화를 접하고, 한국 가족을 통해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과 태도를 배웠다.”
━당신이 만났던 최고의 상대와 최악의 상대는?
“지금 제일 친한 친구이자 하버드 대표팀 파트너였던 스와질란드 출신 친구다. 고등학교 때 세계고교토론대회 그랜드 파이널에 같이 올랐는데 그 다음해 하버드에서 만났다.
최악의 라이벌은 토론에서 거짓말하거나 네거티브 공격을 하고, 큰 목소리로 다른 사람 말을 아예 덮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토론과 대화는 언어게임이다. 단순한 아이디어 교환이 아니라 어떤 단어, 어떤 문장을 어떻게 쓰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수동적으로 읽지 않고 ‘나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계속 자문한다. 작가와 대화하듯 항상 펜을 들고 쓰면서 읽는다.”
━토론의 매력은 무엇인가.
“토론이 재미있는 것은 온 세상을 여행하는 것 같다. 또 자기 목소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자기 안에 여러 캐릭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토론에서 배운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의견 듣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결국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못한다는 것이다. 토론은 다른 사람에게 배우고 믿게 되는 과정이다. 상대를 믿지 않고서는 어떤 대화도 할 수 없다.”
━성공적인 토론의 핵심 팁이 있다면?
“일단 양쪽 의견이 어디서 불일치하는지를 파악하는게 제일 중요하다. 디베이트 제일 잘 하는 친구들은 토론 전 자기 생각만 쓰지 않고 다른 팀은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그쪽의 가장 강력한 논지는 무엇인지를 예상해 미리 써본다. 그 과정에서 ‘아,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내 논지의 취약점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발견하게 된다.”
━토론 교육이 사회 분위기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면? 예를 들어 한국 정치인들이 비방전에 몰두하거나 육탄전을 벌이는 것이 토론문화가 제대로 자리잡지 않아서라는 지적도 있다. 호주는 어떤가.
“정치인들이 유치하게 싸우는 건 글로벌 공통점 같다. 결국 시민들이 더 좋은 대화, 토론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들이 토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기대치를 높여야 한다. 토론의 좋은 점 중 하나는 토론할 때는 나이도 없고, 계급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가 굉장히 드문데 토론에서는 가능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백인정권 마지막 대통령인) 프레데리크 빌렘 데 클레크 전 대통령의 대선 TV 토론이다. 정치적으로 양 극단에 있는 두 사람이 굉장히 직선적이면서도 솔직하게 얘기하고, 마지막에는 넬슨 만델라가 ‘우리는 이렇게 다르고 의견 차가 크지만, 결국 같이 일해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며 클레크의 손을 잡았다.”
━2019년 IBM의 AI ‘프로젝트 디베이터’와 당신의 라이벌이자 최다 토론대회 우승자가 맞붙어 결국 인간이 이겼다. 하지만 최근 챗GPT의 놀라운 발전을 보면서 언젠가 AI가 이길 가능성도 있을까.
“제가 걱정하는 것은 AI가 인간처럼 토론하는 것보다 인간이 AI나 로봇처럼 토론하는 것이다. SNS를 보면 140자 내로 얘기해야 하다 보니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단순해지는 것 같다. 토론에선 단순하면 (경쟁력이) 약해진다. 그러면 AI가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토론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까이다. 극단적인 의견이 과잉 대표되는 시대, 개인이 기계와의 대화에 익숙해지며 더 외로워지는 시대에 어떻게 토론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박사과정을 마치면 변호사로 일할 것 같다. 언론사에서 기자로도 일한 경험이 있는데 계속 글도 쓰며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나누고 싶다. 5월 중순에는 방한해 출판 기념 투어를 하고 대학에서 강연도 할 예정이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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