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주는 땅 파서 장사하니"…얄미운 이 말, '이런 뜻'이었어?[김성훈의 디토비토]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친구A : "제발 전셋값 떨어지면 안되는데."
기자 : "왜?"
A : "임대인이 자금 사정이 여유 있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 나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한테 보증금을 받아서 나한테 줘야 되는데 전셋값이 떨어지면 줄 수가 없잖아."
기자 : "건물 담보로 다른 대출은 없는 거지?"
A : "없긴 한데, 매매가가 전세가랑 거의 같아서 건물주가 부도나면 나도 보증금을 전액 받기는 어려워."
이는 2018년 무렵 친구와 나눴던 대화의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것입니다. 당시 친구는 서울 영등포구 한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는데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조회해 보니 정말 매매가가 전세가랑 거의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깡통 원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최근 전세사기 사고가 빗발치면서 당시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회를 해봤습니다.
신길역 앞 D 오피스텔의 경우 전용면적 30㎡가 올해 1억8000만원 정도에 매매됐습니다. 그런데 이 오피스텔의 전세를 보면, 보통 1억5000만~7000만원선에서 계약됐고, 지난해 6월에는 1억9000만원에 계약된 건도 있습니다. 나쁜 상황을 가정한다면 임대인이 세입자로부터 받은 1억9000만원을 그대로 챙기고 오피스텔을 떠넘겨버리는 게 이익인 것입니다.
인근 Y 오피스텔도 비슷합니다. 매매거래는 2021년 29㎡가 2억8000만원 수준에 팔린 게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전세는 지난해 2억9000만원에 거래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일대 다수의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이 비슷한 상황입니다.
대체 원룸, 오피스텔 전세 가격은 왜 이렇게 비싼 걸까요?
그 이유는 원룸, 오피스텔은 애초에 월세를 받기 위한 수익형 부동산이지, 전세를 주기 위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세는 일반적인 경우라면 임대인 입장에서 보증금을 받아봐야 마땅히 굴릴 곳이 없습니다. 금리가 올랐다지만 여전히 은행예금 금리는 3%대로 월세를 받는 것만 못합니다.
하지만 세입자 입장에서 전세는 비용부담이 낮아 선호하는 상품입니다. 혹여 보증금이 부족하면 정부가 보증을 서주거나 저리로 대출까지 해주니까요.
즉 전세를 주겠다는 사람은 적고, 전세를 살겠다는 사람은 많아서 가격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자 : 월세가 아니라 전세 놓는 사람은 대체 왜 그러는 거죠?
전문가들 : 임대인들도 자선사업가가 아니잖아요. 땅 파서 장사하는 것 아니니까요.
전문가들은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전세로 내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임대인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전세는 역으로 말하자면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대출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임대인이 그렇게 큰 대출을 받아야만 하는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가령 흔하게 발견되는 사례가 빌라, 도시형생활주택, 오피스텔 등을 지었다가 미분양이 나면 전세를 놓고 그 보증금으로 다른 사업장의 공사비를 충당하는 '돌려막기' 방식입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전세사기도 이런 유형이 많습니다.
즉 세입자 입장에서 원룸, 오피스텔은 등기부등본을 떼어봐서 깨끗하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세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임대인의 사정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물주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니니까요.
전세를 놓는 임대인들이 노리는 또 다른 이익은 집값 상승입니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 시세 차익을 노리는 것을 요즘에는 '갭투자'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몇 년 전에는 '무(無)피 투자'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피 같은 내 돈은 한 푼도 안 들이고 투자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최근 몇 년 집값이 급상승했고, 무피투자는 대박을 쳤습니다.
임차인은 임대료 비용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어 좋고, 임대인은 투자 비용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어 좋은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여기에 정부도 끼어듭니다. 정부는 '세입자들의 주거 안정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게 보증을 서줍니다. 주택금융공사의 전세자금대출 보증한도는 2006년 1억원이었지만, 2013년 2억원이 됐고, 지난해는 4억원으로 올랐습니다. 1~2인 가구 증가 추세에 대응한다며 원룸, 오피스텔 등도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게 보증지원도 강화합니다. 주택을 구입하는 대출은 규제해도, 전세대출은 전혀 규제하지 않았습니다.
보증은 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비용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지원정책입니다. 정부는 큰 돈 들이지 않고 세입자의 주거 안정에 기여했다며 생색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대인, 임차인, 정부 모두 좋은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이 있나요. 누군가는 반드시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하죠. 그건 바로 임대인이 챙겨야 할 몫인 '집값 상승'으로, 우리 사회 모두가 같이 부담하는 비용이 됐습니다.
그리고 2021년 금리 인상 이후 집값이 하락하면서 임대인-임차인-정부가 모두 좋은 상황에 균열이 가고, 비용이 다른 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우선은 전세로 돌려막기를 한 전세사기 일당과 무리하게 갭투자를 한 이들이 집값 하락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어 이들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게 돼 임차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전세사기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분별하게 보증을 남발해 '주거 안정'을 달성한 듯 보였던 정부 역시 보증사고 등 비용을 치러야하는 상황입니다. 땅 파서 장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번 전세사기 사태가 터지고 나서 2020년 7월 시행된 임대차 3법(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신고제)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임대차 3법으로 전세 가격이 폭등해 갭투자가 성행했고, 지금 그것이 터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2020년6월~2022년6월 2년간 전국 전세가는 16.85%, 수도권 전세가는 20.87% 올랐습니다.
임대차 3법이 시행되기 전에도 임대료 상승 가능성에 대한 지적은 많았고, 이는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나 국토교통부도 인정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만 민주당이나 국토부는 임대료 상승은 일시적 문제일 뿐, 머지않아 안정을 되찾을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주거 안정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민주당과 국토부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현재까지는 맞았고, 임대료는 일시적으로 상승했다가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전셋값이 일시적으로 상승했다가 하락하는 것이 '전세사기', '깡통전세'의 문제를 동반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못한 것이죠. 아니면 예상했는데도, 일시적 문제이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여기는 걸까요?
서두에 언급한 친구A가 했던 말, "제발 전셋값이 떨어지면 안되는데"는 세입자들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전셋값이 오르면 올라서 고통받고, 내리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고통받는 처지 말이죠. 세입자들끼리의 폭탄돌리기 같기도 합니다.
최근 대출금리가 내려가면서 전셋값이 다시 꿈틀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하락했던 전셋값이 올라가면 '깡통전세'는 일부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입자들은 좋아할까요?
이번 사태 이후로 전세 제도 자체를 없애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람직한지는 찬반 논란이 워낙 팽팽해 입장을 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정부가 전세대출의 보증을 함부로 내어줘서는 안된다는 지적은 경청할만 합니다.
박춘성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낸 '전세제도의 거시경제적 위험과 정책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전세대출)보증 비율을 낮춰 전세보증금이 경제적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시장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세입자들이 진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과 집값을 안정시킬 수 있는 주택 공급도 뒷받침 돼야겠죠. 보증 남발 같은 큰 비용 안드는 꼼수만으로 '땅도 안 파고 주거 안정을 이뤄보겠다'는 식의 정책은 이제 멈춰야할 때입니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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