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車제조업체 몰려드는 美… ‘자동차 왕국’ 명성 되찾나 [심층기획]
폴크스바겐, 20억불 규모 공장 건설 계획
혼다는 오하이오주에 전기차 생산 허브
현대차도 조지아주에 생산라인 건립 중
바이든 행정부 인플레 감축법 발효 효과
북미産 전기차 최대 7500불 보조금 혜택
전기차 전환 속도… 인프라 확충 등 관건
풍부한 석유, 운송수단 없이는 이동하기 어려운 드넓은 땅덩어리, 대량 생산 방식을 고안해 낸 혁신가 헨리 포드. ‘자동차 왕국’ 미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지만 번영에는 언제나 쇠퇴가 따르는 법이다. 1970년대의 1·2차 석유 파동 이후 기름을 많이 소비하는 대형차 대신 소형차 수요가 늘어났으나, 미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시장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소형차 생산에 강했던 일본 업체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왕국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9년에는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붕괴 위기에 몰렸다. 미 자동차 제조업체 ‘빅3’ 중 2곳인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파산을 신청했다. GM은 약 60조원에 이르는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회생했고, 크라이슬러는 2014년 이탈리아 자동차기업 피아트에 인수됐다.
21일(현지시간) 미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전기차 생산을 위해 미국으로 모여들고 있다. 지난 3월 독일 폴크스바겐은 미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20억달러(약 2조6000억원) 규모의 전기 픽업트럭·SUV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착공하는 공장은 2026년 말부터 본격적인 전기차 생산에 돌입, 약 4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전망이라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이번 투자 계획은 폴크스바겐이 지난해 3월 2030년까지 미국 시장에 약 25개의 전기차 모델을 선보이기 위해 향후 5년간 약 71억달러를 북미 대륙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폴크스바겐은 지금도 미 테네시주에서 9만여대의 전기차를 생산 중이다.
일본 혼다는 미 오하이오주에 전기차 생산 허브(hub)를 건설하고 있다. 혼다는 1982년 처음으로 미국산 혼다 자동차를 생산한 메리스빌 공장 등 기존의 내연기관차 제조시설을 전기차 생산시설로 전환하는 중이다. 혼다는 국내 최대 배터리 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과 손을 맞잡고 오하이오주에 전기차 배터리 합작 공장도 건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역시 미 조지아주에 전기차 생산공장과 배터리 공장(SK온과 합작)을 짓고 있다. 배터리 합작 공장의 경우 2025년 완공이 목표며 투자 규모는 40억∼50억달러에 이른다.
미국이 전기차 생산의 ‘핫플레이스’로 거듭나게 된 건 지난해 8월 발효된 IRA 덕이다. IRA는 북미산 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한다. 보조금을 받으려면 전기차 배터리에 사용된 핵심 광물의 40% 이상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추출·가공해야 하고, 배터리 부품의 50% 이상을 북미에서 제조해야 한다.
우리 돈 1000만원에 이르는 보조금은 기업 입장에서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혜택이다. 아르노 안틀리츠 폴크스바겐 최고재무책임자(CFO)는 20억달러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IRA의 혜택은 미국에서 폴크스바겐의 입지를 더 빠르게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혼다 역시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미국 내 공장에 32억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600개 이상의 미국 부품업체와 협력하고 있다”며 지난달 오하이오주 투자 계획 발표와 함께 자사의 미국 내 공급망을 강조했다.
생산 기반을 확보한 바이든 행정부는 전기차 전환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미 환경보호청(EPA)은 지난 12일 2032년까지 자국산 신차의 67%를 전기차로 대체하기 위한 탄소배출 규제안을 내놨다. 2027년식부터 2032년식 신차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미세먼지 등의 배출 한도를 연평균 13%씩 감축시키는 게 골자다. 한도를 맞추기 위해선 전기차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이 파격적인 규제안이 발표되자 “급격하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전기차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아서다. 전기차 충전소·전력망 등 미국 내에 조성된 전기차 인프라에는 한계가 있고,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공급망 다각화·안정화에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올해 초 바이든 행정부는 2030년까지 미국 도로에 최소 50만개의 전기차 충전소를 설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백만개의 충전소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경기 침체로 아직은 내연기관차보다 비싼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둔화하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미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지난달 미국인 1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41%가 높은 가격과 부족한 충전 시설 등을 이유로 ‘전기차를 구매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일자리의 손실도 지적된다. NYT는 “전기차 조립에는 내연기관차보다 절반도 안 되는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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