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 90대에 모친을 군홧발로 죽여도 "수탈은 없었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한반도를 강탈한 일제는 곧바로 토지조사(정식 이름은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들어갔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햇수로 9년에 걸쳐 이뤄진 토지조사의 목적은 한반도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신용하(전 서울대교수, 사회학)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조선 왕실 소유였던 농경지, 임야, 미개간지 등을 일본의 국유지로 편입한 것까지 더하면 한반도 전체 토지의 50.4%가 일제에 수탈당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를 통해 확보한 땅을 1908년 국책회사로 설립된 동양척식회사(줄여 '동척')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했고, 조선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 농업이민자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반일 종족주의>(이영훈 외, 미래사, 2019)는 일제의 토지조사를 가리켜 '이 땅에 사는 조선인 전체를 일본인으로 완전 동화시킬 거대 프로젝트'로서, '그들(일본인)의 법과 제도를 이 땅에 이식'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당시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오늘날에도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이영훈 외, 39쪽). 이를테면 번지와 주소가 붙여진 것도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총독부의 토지조사에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넌지시 비추지만, 실제 그때 분위기는 어땠을까.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관리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마을에 들어서면, 주민들이 반감을 품었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 논밭을 왜 왜놈들에게 신고하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들을 품었을 것이다. 소유권을 둘러싼 폭력적 분쟁이 생겨나기도 했다. 토지 수탈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신친일파'들도 일부 지역에서 분쟁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분쟁이 벌어져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 토지조사로 땅을 잃은 조선 농민들의 눈물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비껴간다.
농민에게 태형 90대, 농민 모친을 군홧발로 차 죽여
이규수(히토쓰바시대교수, 사회학)가 쓴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수탈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 (동북아역사재단, 2021)과 신용하(전 서울대교수, 사회학)가 쓴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나남, 2019)에는 일제의 토지 침탈에 얽힌 어두운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토지 수탈은 없었다'는 <반일 종족주의>의 논조와는 다르다. 신용하교수의 비판을 먼저 들어보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왕실 소유의 궁방전(宮房田)이나 관청 소유의 역둔토(驛屯土)와 미개간지를 약탈해 식민정책의 유용한 자금원으로 썼다. 그 일부 토지는 친일파들과 일본 이민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토지 약탈'에 대한 조선 농민들의 반항 투쟁을 조선총독부가 지닌 관권으로, 다시 말해 힘으로 내리눌렀다. 분쟁이나 저항이 일어나면 강제로 '화해'시키거나 소송을 취하시키고, 그렇게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엔 헌병경찰의 무력으로 탄압했다. 동척이 조선 농민들을 착취하는 거대한 식민지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였다."
동척이 처음 설정했던 목표는 '한국에서 토지를 합법적으로 수탈하고 10년에 걸쳐 24만명의 일본 농업 이민을 이주시켜 식민지배의 인적 물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었다(이규수, 47쪽). 동척이 가장 먼저 매수하려고 점찍은 곳이 전라남도 나주의 궁삼면(宮三面) 토지였다. 그곳에서 위의 신용하가 지적한 그대로 토지 약탈에 맞선 투쟁이 벌어졌다.
궁삼면은 실제 행정지명이 아니라, 지금의 영산포에 가까운 3개 면(나주군 지죽면, 상곡면, 욱곡면)의 궁토(宮土)를 뜻한다. 여기서 '궁토'는 영친왕의 생모인 순빈 엄씨를 위해 지어진 경선궁 소유의 땅을 가리킨다. 그 땅의 원래 주인은 현지 농민들이었다. 조선왕조 말기의 부패와 혼란 속에 궁토로 둔갑했고, 그 때문에 그곳 농민들과 경선궁 사이엔 소유권 분쟁이 생겨났다.
교활한 동척 간부들은 바로 그런 분쟁을 노려 헐값에 매입하려 들었다. 매매계약을 망설이는 경선궁 쪽에다 "나중에 면 농민들과의 분쟁에서 패소하더라도 경선궁에 어떤 손실도 끼치지 않겠다"고 구슬렀다. 그리곤 시세 200만원의 땅을 8만원이란 헐값에 사들였다. (면적은 2,500정보, 평수로는 750만평)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매수 행위였다. 이규수는 "동척의 궁삼면 토지 매수는 농민들의 민유지를 불법적으로 탈취한 것으로, 사전에 민유지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비판한다(이규수, 50쪽).
궁삼면 일대는 목포로 이어지는 영산강의 물류 중심인 영산포에 가까운 비옥한 곡창지대였다(당시 궁삼면 3개 면의 농가 호수는 1,457호, 총인구는 약 2만 명). 동척이 탐낼만했다. 도대체 동척은 무엇을 믿고 소유권 분쟁중인 궁삼면 일대의 토지를 사들였을까.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의 힘이다.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동척이 그곳 농민들에게 소작 계약을 맺으라고 통고하자, 농민들은 당연히 거절했고 저항에 나섰다. 그러자 농민 4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들은 태형(笞刑) 90대라는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토지 소유권 주장을 접고 소작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매를 맞는 사람의 인간적인 모멸감도 엄청 크지만, 태형 90대라면 후유증으로 죽을 수도 있는 끔찍한 형벌이다. 일제는 그런 야만적 폭력으로 농민들이 움츠러들길 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농민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현해탄을 건너올 일본 농업이민자들을 위해 동척이 세워놓은 집들을 망가뜨리고 농기구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런 갈등 속에서 한 농민의 어머니가 일본 헌병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 동척 사원이 궁삼면에 출장을 가서 이회춘 소유지를 (일본 농업)이민 배당지로 선정해 강제로 토지 분할 표목들을 박으려 했다. 이를 목격한 이회춘의 어머니는 "이 논은 우리 소유인데 표목을 박은 이유가 무엇이냐?"며 소리치고 표목을 뽑아버렸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군홧발로 그녀의 가슴을 걷어차자 논두랑에 고꾸라져 즉사하고 말았다. 이회춘은 비분하며 법원에 애소(哀訴)하려 어머니 시체를 지게에 지고 이웃 네 명과 함께 밤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영산포 부근 남평에 이르러 일본 헌병에 발각돼 어쩔 수 없이 영산포로 돌아왔다](이규수, 55-56쪽).
농업인구 0.2% 일본인이 조선 논 5분의 1 소유
해를 거듭할수록 한반도의 토지는 일본인들 손에 넘어갔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 자료는 일본인들의 소유 경지 면적이 갈수록 크게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1910년 당시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논 면적은 조선 전체 논의 5.1%에 지나지 않았다(이것도 실은 높은 비율이다!). 그런데 1932년엔 소유 비율이 16.1%로 늘어났다. 1910년에 7만 정보였던 일본인 소유경지(논과 밭)는 1932년 40만 정보로 22년 사이에 5.7배로 늘어났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과 고교·대학(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인 허수열(전 충남대교수, 경제학, 2023년1월 타계)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후반기엔 식민지 조선 농업인구의 0.2%밖에 안 되는 일본인이 조선 논의 5분의 1 가량을 갖게 됐다(1935년 18.9%). 더구나 토지생산성이 더 높은 평야지대의 농경지들이 일본인 소유로 집중되면서, 농업인구 1인당 농업수익의 민족별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일본인들의 1941년 농가 호당 경지면적은 조선인들의 54배였고, 일본인들의 1인당 미곡 수취량은 1942년 조선인보다 96배나 많았다(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7, 338-340쪽).
일제 강점기의 농업은 소작제 농업이 주를 이뤘다. 소작지 비중이 1918년 이미 65%를 넘어섰고, 1920년대 말 67~68% 수준에 이르러 그 상태가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허수열, 113쪽).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뒤 거대한 식민지주로 등장한 동양척식회사는 50%가 넘는 소작료로 조선 농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다.
"폭력을 빼고 식민지 경제구조 말 못한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친일파'들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정책에서 강제와 폭력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인 '교환 관계'가 있었다면 (다시 말해, 사기든 강제든 소액이라도 대금을 지불했다면) 수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탈의 개념을 '아무런 대가 없이 강제로 빼앗아가는 행위'로 좁힌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빼앗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신친일파'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앞의 경제학자 허수열도 '수탈'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수탈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교환관계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을 고려한다면, 수탈이라는 실체가 애매모호하게 돼버린다는 얘기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신친일파'들과는 달리) 일제의 가혹한 수탈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내 책에서 '수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할 것이지만, 결론은 수탈론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적었다(허수열, 29쪽).
그렇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농민들을 곤장으로 90대나 내려치고 농민의 모친을 군홧발로 차서 죽인) 전남 나주 궁삼면 일대의 폭력적 수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냥 운이 없었던 사람들이 겪은 예외적 상황으로 넘겨버려도 되는 것일까. 이와 관련, 한국의 '신친일파'가 내세우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해온 마츠모토 다케노리(도쿄대교수, 농업사)는 "일제 식민통치의 폭력성에 눈 감아선 안 된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묻는다.
"폭력의 문제를 제외하고 식민지 경제구조(특히 그 기원)를 논하는 것이 가능할까? 국민경제에서 원시적 축적기에 해당하는 식민지 조선의 1910년대를 분석하려고 할 때에 식민지 권력에 의한 폭력을 '본질적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마츠모토 다케노리,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넘어가기 위한 귀중한 걸음」<내일을 여는 역사> 48, 선인, 2012, 283쪽).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
<반일 종족주의>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일본인들의 농경지 소유 면적과 비율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난 배경에는 다름 아닌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좁은 의미의 수탈'이 없었다고 우기는 '신친일파'들의 논리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론'이다. 이와 관련, 일제 강점기의 조선 농민의 비참한 실상을 연구해온 전강수(대구가톨릭대교수, 토지경제학), 신용하(전 서울대교수, 사회학)의 비판.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크게 늘어난 것은) 토지조사사업이 창출한 제도적 환경(이를테면 등기제도의 확립으로 소유권 이전 활성화), 일제의 권력적 강제와 지주 중심적 농업정책, 그리고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겸병 의지(다시 말해서, 탐욕)가 함께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이를 토지 수탈이라 하지 않으면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할까? 이영훈과 김낙년은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순 날강도'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전강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 한겨레출판, 2020, 121쪽)
"부분적 사료와 통계를 잘못 사용하면서 학문의 탈을 쓰고 아무리 일제 식민지정책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주장을 해도, 일제 식민지정책의 '전체' 수탈적 '구조'와 '본질'에 배치된 미화이면 일제 식민정책 옹호론·변호론에 지나지 않는다"(신용하, 179쪽)
공출(供出)은 일제 말기에 벌어졌던 폭력적 수탈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42년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는 쌀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공출이란 이름으로 조선 농민들의 쌀을 헐값에 강제로 사들여 일본으로 수출하거나 침략전쟁의 군용미로 썼다. 조선총독부는 개인별 공출 할당과 더불어 '부락 책임 공출'이라는 올가미로 마을마다 책임을 지웠다.
죽창 들고 가택수색으로 공출 강요
'신친일파'들은 "공출할 때 헐값이라도 어쨌든 대가를 지불했으니 수탈은 아니다"라고 우기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죽창을 들고 집안을 뒤지는 살벌했던 공출제도 아래서 농민들은 정해진 할당량을 마지못해 내다바쳤다. 막판에는 제사를 지낼 요량으로 숨겨둔 쌀마저 빼앗겼다.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자료에는 1941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총독부로서는 내지(일본)에 약속한 수량은 반드시 이출(移出)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무가 있고, 도(道)나 군(郡)도 총독부로부터 할당받은 수량을 공출로 확보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는 결의 아래, 심하게는 죽창을 갖고 가택수색을 하고, 농가는 농가대로 변소나 굴뚝 밑, 밭 가운데 숨기는 음침하고 참혹한 분위기가 지방 일대에 만연하고 살벌한 광경이 곳곳에 벌어져,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에 이르렀다](大藏省管理局, <日本人の 海外活動に 關する 歷史的 調査> 朝鮮編 第9分冊, 1946).
일제는 1939년 '미곡배급통제법'을 만들어 쌀을 시장에다 내다파는 것을 제한하고, 농민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쌀의 대부분을 헐값으로 사들였다. 위의 상황은 공출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1942년)되기 전, 그러니까 개인별 공출 할당이 이뤄지지 않았던 1941년 무렵이다. 공출이 본격화된 뒤로 1945년 8.15를 맞이할 때까지 일제의 쌀 수탈이 얼마만큼 가혹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수탈에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농민들의 저항으로 공출 실적이 기대만큼 오르지 못하자, 일제는 1943년 '식량관리법'이란 이름의 또 다른 악법으로 보리·면화·마류(麻類)·고사리 등 40여 종의 농작물을 강제 공출해 갔다. 일제는 공출 할당량을 확보하려고 경찰과 군·읍·면 직원, 그밖의 관계기관 직원들을 동원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공동 수확과 공동 탈곡·조제를 하도록 윽박질렀다. 쌀을 몰래 뒤로 빼돌리는 것을 막고 탈곡 현장에서 바로 쌀을 수매 장소로 옮김으로써 공출(다시 말해서 수탈) 실적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공출로 걷어간 쌀 대신 만주에서 콩이나 피 등 동물용 사료나 마찬가지인 잡곡을 들여와 먹도록 했다. 1940년 식량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그 무렵 조선에 머물렀던 한 러시아 여성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때 조선에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을 정도의 음식물만이 배급되었다. 말을 막 배우는 아이의 첫마디와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말이 '하이큐'(배급)라는 것을 조선인들에게서 수없이 들었다. 배급표에 따라 지급되는 쌀의 대체물(옥수수, 수수)은 아무리 길어도 (한 달에) 2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생선, 달걀 같은 식료품들은 일본인에게만 지급되었다. 서울에서도 못 먹어 부황이 든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파냐 샤브시나, <식민지 조선에서: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기록> 한울, 1996, 179-181쪽).
송규진(고려대교수, 한국근현대사)은 '일제하 물자동원과 식민지 민중의 생활상'을 다루면서조선인 1인당 식량소비량의 변화를 살폈다. 조선은행 조사부가 펴낸 <조선경제연보>를 분석한 송교수에 따르면, 1910년엔 조선인 1인당 식량소비량이 미곡 0.71석, 잡곡 1.32석(합계 2.03석)이었다. 1945년 일제 패망 무렵 미곡 0.55석. 잡곡 0.50석(합계 1.05석)으로 조선인들의 식량소비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위원회,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삶과 민족운동> 경인문화사, 2005, 384-385쪽 참조). 위 러시아 여성이 보았다는 '못 먹어 부황이 든 사람들'이 영화 속 좀비마냥 그냥 불쑥 나타난 게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라고?"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침략전쟁을 벌이던 일본 군인과 '내지인'(內地人, 일본인)들을 먹이려고 '공출'이란 이름의 식량 수탈로 식민지 피지배자들을 굶겼다는 것 말고 더 적당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그 무렵 조선 농민들은 중세의 농노나 다름없는 억압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중세 농노와의 차이란? '자본주의적 교환'이란 허울뿐인 거래로 생산 원가에 턱없이 못 미치는 헐값의 대금을 받는 것뿐이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나가거나, 도시 주변부 빈민촌에 터를 잡고 저임금 일용직 노동자로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말 그대로 기아선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구조적인 민족차별과 불평등에 따른 빈곤의 수렁이었다.
실상이 그랬는데도, <반일 종족주의>의 6인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낙년(동국대교수, 경제학, 낙성대연구소장)은 책에서 이렇게 묻는다. "조선의 쌀을 일제가 수탈한 것일까요, 아니면 조선이 일본으로 쌀을 수출한 것일까요?"(45쪽). 그는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며 더 나아가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 일본이라는 대규모 쌀 수출 시장이 생긴 덕분에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47쪽), '공출이 조선 농민의 소득증가에 크게 기여했다'고까지 우긴다(49쪽). 통계표를 제시하면서 실증적 연구인양 포장했지만, 민족간 불평등(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을 고려하지 않는 주장은 조선 농민의 비참한 실상을 가리고 논리적으로도 비약이 너무 심했다는 비판을 받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한 신용하교수의 지적.
"일부 뉴라이트 경제사학도의 방법은 일제 식민지정책의 미화와 옹호에 적합한 어느 작은 '조각'이나 '부분'의 사례와 숫자만 보면 이것을 부당하게 '전체'의 증거로 미화하고 확대 일반화하면서, 기존의 귀중한 실증적 연구들을 과격한 비판으로 공격하는 수준 낮은 것이다"(신용하, 178쪽)
"점령지에서 경제적 이득 챙겼다면 그게 수탈"
다른 많은 비판적 연구자들도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일본의 억압지배에 배를 주렸던 한민족의 신음소리는 못 들은 체 하면서, 입맛에 맞는 통계만 골라 뜯어 맞췄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분석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다. 지난 주 글에서 썼듯이, 경제학자 허수열은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결같이 조선이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그런 분석은 의미가 없고 잘못됐다"고 했다. '지역' 기준보다는 조선인이라는 '민족' 기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민족' 기준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 땅 위에서 이루어진 개발은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고, 조선인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허수열, 338쪽). 토지 수탈로 소작인이 됐고, 쌀 공출로 배를 주렸다. 농업뿐 아니라 공업은 민족간 불평등이 더 심했다. 1942년의 경우 공장과 광산 등 전체 공업자산의 95%가 일본인 소유였다. 허수열의 연구에 따르면, 1인당 국내총생산이 성장한 시기는 겨우 1932~1937년 사이 뿐이다.
경제학자들은 적어도 30~40년 간 지속적 성장을 보여야 근대적 경제성장이라 주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이 이뤄진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결론적으로 허수열은 일제 강점기 시기를 가리켜 ('신친일파'들이 주장하듯 '근대화의 시대'라기보다는) '야만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일제 억압통치에 한없이 너그러운 '신친일파'에게 묻게 된다. "이런 민족간 불평등이 식민지 근대화인가요? 이게 바로 수탈의 결과가 아닌가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한 후, 강제력을 동원해 그 나라 사람들을 자기 의도대로 부리고, 그 과정에서 그 나라의 토지와 자원을 마음껏 활용해서 이익을 얻었다면, 그것이 바로 경제적 수탈이다. (8.15)해방 이후 많은 경제사학자들은 수탈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해왔다.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다"(전강수 153쪽).
위에 옮긴 전강수의 결론대로, 군사적 점령지인 식민지로 '기회'를 찾아 옮겨온 세력이 경제적 이득 챙겼다면, 그게 곧 수탈이다. 그러나 <반일 종족주의>는 수탈의 개념을 아주 좁게 해석한다. 적게라도 돈을 주었으면 수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좁은 의미의 강제연행'을 내세우며 '위안부' 강제동원을 아예 부인하려 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좁은 의미'를 내세우며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일본 극우들의 논리와도 빼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친일파'에게 또 다시 묻게 된다. "당신들의 정신적 모국은 어디인가요?"
글이 길어져 하편을 1,2로 나누었다. 다음 주에 다룰 주제는 독도와 교과서 문제다. 나라 밖에선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안에선 '신친일파'의 목소리가 크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랫말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이라면 모를까, 독도 영유권 논의 자체가 소모적이다. 하지만 저들이 무얼 바라고 저러는지 짚어보려 한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경화 흐름은 지난날 전쟁범죄를 축소 왜곡하고 교과서 내용을 변질시키고 있다. 그들은 외친다. "독도는 일본 땅이고, 역사전쟁에서 우리가 이겼다!" 신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극우와 그에 발맞추는 '신친일파', 여기에 미국의 친일분자까지 염치없이 끼어든 '역사전쟁'의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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