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동거인’을 보호하라 [배정원의 핫한 시대]
‘생활동반자법’, 국민의 ‘행복권’을 국가가 울타리 되어 보장하는 것
(시사저널=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보건학 박사))
독신인 중년 여성 A는 싱글들의 모임에서 아내와 일찍 사별한 B를 만났다. 서로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만난 지 1년이 되는 해 살림을 합쳐 함께 10년 넘게 살았다. 재혼도 생각했으나 각각 자식들이 있었고, 재산 상속과 호적 등 복잡한 문제로 얽히는 것이 싫어 동거로 살았다. 그동안 서로 돌보고 자녀들의 문제도 함께 의논하면서 해결하는 등 결혼만 안 했지 부부처럼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B가 말기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급히 입원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B의 위급한 수술에 대한 결정을 법적인 보호자가 아닌 A가 할 수 없었고, 따로 사는 자식을 불러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B의 자녀들은 웬일인지 A가 병원에 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보호자증도 받을 수 없어 B의 병세를 알 수 없었던 A에게 B의 아들이 사망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장례는 B의 자녀들 주도로 급히 진행되었으며, 평소 두 사람이 '누구든 먼저 죽으면 이렇게 해주자'며 약속했던 장례 형식은 무시되었다. 법적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A는 그저 손님보다 못한 존재로 부부같이 살던 사람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B의 자식들은 아버지 명의로 돼있던 집을 팔겠다고 내놓았으며, A에게 빨리 나가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 지인들의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다. 사람들의 삶의 양식은 다양해지고 있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게 당연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 같다. 더 이상 젊은이들은 결혼을 당연한 인생의 과정으로 여기지 않으며, 동거나 비혼을 선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커플도 적지 않다. 결혼과 동거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식 변화는 현저해 2018년 통계청이 실시한 사회조사에 따르면 '동거할 수 있다'는 응답이 56.4%였으며, 특히 20대는 무려 74%였다고 한다.
정의당 등에서 곧 발의하겠다고 밝혀
홀로 된 중년층(45~64세)도 기대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이성 교제에 대해 개방적이 되어, 재혼은 하지 않지만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고자 하는 황혼동거도 늘어나고 있다. 또 동성애가 아니더라도 동성친구와 함께 가구를 이뤄 살고자 하는 이들도 꽤 있다. 2020년 여성가족부의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보고서에서 10명 중 6명(61%)이 법령상 가족 범위를 동거로까지 넓히는 데 찬성했으며,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생계와 주거를 공유한다면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10명 중 7명(69%)이 동의했다.
이러한 국민의 의식 변화와는 다르게 우리 정부의 법과 제도에 대한 의식은 여전히 '가족'의 개념을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형태'로 정의하고(민법 제779조), 혼인신고를 한 결혼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국가 정책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따라서 청년동거, 위탁가정, 비혼공동체, 황혼동거, 동성커플 등 다양한 법외 가족들은 의료·주거·사회 서비스에서 밀려나 '없는 존재'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동거하며 가족 역할을 하고 있으나, 법적 정의의 가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동거인은 은행·학교·우체국·관공서 등 각종 사회제도가 요구하는 '가족증빙'이 어려워 의료·주택·금융·세금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앞서의 A에게서 보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세월을 배우자처럼 함께 보냈다 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왕래 없이 살았던 직계가족이나 형제자매가 오랜 시간 같이 사랑하며 함께 살았던 파트너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난센스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 최근 정의당과 기본소득당에서 곧 발의하겠다고 밝힌 '생활동반자법'안이다. 이 '생활동반자법'은 2014년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발의하려던, 특정인 1명과 동거하며 부양하고 협조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성인을 '생활동반자'로 규정하고 배우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생활동반자 관계에 대한 법률안'을 기초로 하고 있다. 진 의원이 발의하려다 결국 포기한 데는 '동성애 결혼에 대한 반대와 가족 해체 우려'를 내세운 일부 보수세력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 밖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로 한 시민들의 선택을 국가가 법으로 보장하는' 비슷한 법으로 이미 프랑스의 팍스(FACS·시민연대계약·1998년)가 있으며, 스웨덴의 '함께 살기(Sambo·1987년)', 네덜란드의 '파트너십 등록법(1998년)' 등이 있다.
법 제정되면 출산율도 더 높일 수 있어
이미 세계의 많은 나라가 국민이 선택하는 다양한 삶의 양식을 존중하고 법으로 보장해 왔다는 뜻이다. 특히 프랑스의 팍스는 원래는 동성커플의 법적 권리 보장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이성커플이 95%를 차지한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청년이든 노년이든, 어떤 관계든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성인들이 제도권 안에서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혼인과 혈연이 아닐지라도 서로 신뢰하고 부양하며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 국가 제도 안에서 적절하고 평등한 복지 혜택을 주고,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 말이다. 어쨌든 이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되고 입법되면,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인도 법적 효력이 있는 약정서를 국가에 제출하면 배우자와 비슷한 일정한 권리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생활동반자는 동거·부양·협조의 의무를 지며, 이는 각종 사회보장이나 세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가사 대리권, 가사로 인한 채무의 연대책임을 가지며, 생활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한다. 재산 관계는 사전에 협의해 약정할 수 있으며, 상대방 가족과 인척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상속권은 없으며, 관계를 해소하고자 하면 둘의 합의나 한쪽이 해소를 원하면 가능하다. 생활동반자법이 입법되면 추후 세칙에 의해, 상대에 대한 수술 동의, 연명치료 등 의료결정권을 가지며,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를 권리를 가진다.
또 국민연금, 각종 보상금,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으며 주택임차권 승계가 가능하며 전세, 대출 등 혼인한 부부에게만 지원되던 주택금융상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동반자는 소득공제 대상이 되며,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얻을 수 있으며, 가족돌봄 휴가, 출산·육아 휴가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보다 자녀 출산율이 저조하던 동거에서도 출산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동거 및 동거인, 그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결혼 제도 안에서 출산한 자녀들과 평등한 사회복지적인 정책들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올해 초 법원에서는 동성부부에게도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바 있으며,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의장에게 '생활동반자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다행히 제1야당에서도 '생활동반자법 제정'에 대해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니 새삼 기대가 된다. '생활동반자법'은 국민이면 마땅히 누려야 하는 '행복권'을 국가가 보장해 준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숱한 명언을 남긴 미국의 영화제작자 트레이 파커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이란 네가 누구의 핏줄이냐가 아니야, 네가 누구를 사랑하느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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