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베토벤 9번 합창’…“‘환희’를 ‘자유’로, ‘울림’ 넘어 ‘어울림’”
다음달 베토벤 ‘교향곡 9번’ 첫 지휘
성악 파트 우리말 공연도 첫 시도
‘복고·반동 빈 체제’ 저항한 베토벤
원곡 본뜻 되살리려 ‘충실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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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 되는….”(정적)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혼성 4부 합창이 또다시 뚝 끊겼다. 지휘자가 살짝 고개를 흔들며 팔 동작을 멈춘 것이다.
“4박자 노래 할 때 강-약-중강-약을 생각하며 행진곡처럼 강박만 강조하지 마세요. 약자보호법! 오히려 약박에 있는 음표들 중에서도 가장 짧고 여린 음표에 더 정성을 기울이고 배려하세요.”
이번엔 지휘자가 피아노 건반을 쳐가며 지휘했다.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까지 4개 파트가 아름다운 한소리를 만들어냈다.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 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훨씬 좋잖아요. 갈수록 더 좋아지겠지만.” 지휘자는 합창단을 격려하면서도 악보의 한 소절마다 세밀한 주문을 잊지 않았다.
지난 12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 강남새사람교회. 합창단원 100여명이 음표와 지시문이 빼곡한 악보를 펼치고 연습에 한창이었다. 지휘자는 구자범, 곡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흔히 ‘합창 교향곡’으로 불리는, 베토벤의 아홉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이다. 베토벤이 1824년에 완성해 초연한 이 작품의 본디 표제는 ‘환희(기쁨)에 부치는 송가’다. 앞서 1785년 독일 시인 실러가 쓴 송시 ‘환희에 부쳐’에서 영감을 얻고 시의 일부를 합창의 노랫말에 담았다. 관현악곡인데도 제4악장에 솔로 4명과 대규모 합창단의 성악 파트가 가세해 한껏 고양된 감정과 숭고미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5월7일, 베토벤 초연과 같은 날
베토벤 필생의 역작이자 서양 클래식 음악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교향곡 9번이 5월7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된다. 기악 연주자 92명과 성악부 260명의 대규모 편성이다. 국립심포니, 인천시향, 대전시향, 경기필하모닉 등 여러 교향악단의 정상급 연주자들이 모여 이번 공연만을 위한 기획성 오케스트라인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성악부도 국립합창단, 서울시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참콰이어 등 여러 합창단 소속 성악가들이 뜻을 모은 페스티벌 합창단이다. <한겨레>는 이날 성악부 연습에 앞서 구자범 지휘자(이하 호칭 생략)를 만났다.
이번 연주회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말로 부르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이라는 것. 구자범이 2년에 걸친 원곡 해석과 연구 끝에 번역을 완성했다. 이 곡의 성악 파트를 우리말로 번역해 부르는 것은 한국 음악사에서 처음이다. 독일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수석지휘자까지 했던 25년 지휘 경력의 구자범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구자범에게 베토벤은 ‘운명’ 같은 작곡가다. 그는 연세대 학부에 이어 대학원도 철학과로 진학했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음악, 더 정확히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뒤, 독일의 유수한 국립오페라극장들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해석학과 언어철학을 비롯해 독일 철학을 공부했던 게 고전음악의 정확하고 풍부한 이해에 도움이 됐다. 독일은 바흐,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슈만 등 클래식 음악의 거장들을 배출한 본향이다. 구자범도 독일과 한국에서 베토벤의 여러 작품을 지휘했다. 그런데 매년 전세계에서 수없이 연주되는 교향곡 9번의 지휘봉을 왜 이제야 잡는 걸까?
“어렸을 때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는 게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중학생 때 언젠가 꼭 이 곡을 지휘해보겠다고 결심했죠. 그런데 지휘자가 된 뒤로는 ‘이 작품이 워낙 위대한 정신성을 담고 있는데 내가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확신이 들기까지 미루다가 이제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휘를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구자범이 이 곡을 굳이 우리말로 힘들여 번역하고 올해 5월에 첫 지휘를 하는 것에도 나름의 뜻이 있다.
“베토벤(1770~1827)이 곡을 쓴 때가 1823년, 지금 저와 나이가 똑같을 때입니다. 이번 연주회 날짜도 베토벤이 빈에서 초연했던 5월7일에 맞췄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이 이 곡의 초연을 지휘한 건 1824년, 내년이 꼭 200주년이에요. 저는 한해 앞서 하는 거죠. 내년이면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기념 공연이 열릴 겁니다. 그중에 ‘우리말 연주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우리말 표현’ 감동 제대로 전달
대다수 오페라 공연처럼, 이번 공연에서도 가사는 원어로 부르고 우리말 번역은 스크린에 자막으로 보여줄 수도 있을 테다. 그런데 왜 구자범은 굳이 우리말 합창을 하는 걸까? “예를 들어 우리가 태국(타이) 영화를 보면서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고 느낀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가 태국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배우가 자기 나라 말로 대사를 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겁니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 해도 우리말로 할 때만큼 감동을 전하지 못해요.” 구자범은 리허설 중에도 단원들에게 이런 점을 강조했다. “합창단이 (가사의) 내용을 알고 부르는구나, 하는 걸 관객이 느껴야 해요. 우리가 먼저 노래를 하면서 감동을 느껴야 그 감동이 청중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우리말로 부르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에서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독일어 노랫말을 단순히 ‘직역’한 게 아니라 베토벤 원곡의 충실한 ‘해석’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그 차이는 합창부의 맨 처음 가사부터 곧바로 드러난다. 원곡에서 합창부는 베이스 솔로가 “프로이데!”(Freude, 환희·기쁨)라고 외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구자범은 이 단어를 “자유”로 옮겼다. 독일어로 ‘자유’는 ‘프라이하이트’(Freiheit)다. 베토벤이 이 곡을 완성하기 10년 전인 1814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선 유럽의 열강이 프랑스혁명의 기운과 공화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복고·반동 동맹인 빈 체제가 출범했다. 그 한복판에서 베토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류의 형제애를 노래한 교향곡 9번을 연주한 것이다. ▶관련기사=[유레카] 1817년 베토벤, 좌절과 환희
‘환희’를 ‘자유’로 바꿔 부른 사례가 없지는 않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처음 맞은 성탄절, 동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울려 퍼졌다. 4악장 합창부의 첫마디를 베이스 솔로가 “프라이하이트!”라고 노래하자, 테너와 베이스 합창이 “프라이하이트!”라고 맞받은 데 이어 본격적인 성악부 연주가 이어졌다. 다른 가사들은 원곡대로였지만 ‘프로이데’는 끝까지 ‘프라이하이트’로 바꿔 불렀다. 곡 전체에서 단어 하나를 바꾼 것만으로도 ‘환희의 송가’는 ‘자유의 송가’로 탈바꿈했다.
“실러가 ‘환희에 부쳐’를 쓴 것은 프랑스혁명(1789년) 이전입니다. 혁명의 기운이 움트고 있긴 했지만 절대왕정 폭압도 만만치 않았어요. 사람들이 ‘자유’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게 위험하던 때였지요. 실러는 시에 ‘프로이데’(기쁨)란 단어를 썼지만, 진짜 의미는 ‘자유’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걸 다 알아들었을 겁니다.”
음악언어로 철학을 쓴 신념 고백
구자범은 그보다 더 나아갔다. 4악장 합창의 가사 전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는 “베토벤이 실러의 원시에 표현된 종교적 편향성을 지우고 보편성을 확장해 시나리오를 재구성했다”며, 그 해석을 우리말 번역에도 최대한 충실히 반영했다. 자신이 베토벤을 새롭게 해석한 게 아니라 베토벤의 본디 해석과 참뜻을 고스란히 되살렸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도입부의 “환희!”라는 외침에 곧바로 이어지는 원곡 가사 “환희여, 신들의 광휘여”(직역)가 구자범의 악보에선 “자유, 삶의 참빛이여”가 됐다. “자유야말로 진정한 환희죠. 실러가 시의 초판본에 썼던 것처럼 ‘거지와 왕자가 형제 되고’, 만인이 계급적 속박을 끊는 해방이잖아요. 클래식(고전)을 옛날 것이라고 가볍게 볼 수 있지만 당대에는 가장 진보적이고 새로운 것이었어요. 오늘날 ‘보수’의 가치도 실은 ‘진보’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신들의 광휘’를 ‘삶의 참빛’으로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계몽주의자였던 베토벤에게 핵심 단어는 ‘빛’이었습니다. 영어로 ‘인라이튼먼트’(enlightenment)라는 게 빛을 비춘다는 뜻이잖아요. 실러의 원시 1연은 ‘기쁨, 아름다운 신들의 빛이여, 낙원의 딸이여, 하늘님이시여’라는 점층법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걸 뒤집어서 맨 마지막 가사를 ‘하늘, 고운 님이여, 자유, 삶의 참빛!’으로 끝냈어요. 낙원의 딸이나 하늘님보다 삶의 참빛이 더 중요했던 거죠.”
구자범은 ‘합창 교향곡’이 실러의 시에 곡을 붙였다고 알려진 것도 “잘못된 오해”라고 강조했다.
“시에 ‘곡을 붙인다’는 표현은 가곡을 쓸 때 그렇게 말합니다.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분해하고 재구성해서 정교한 시나리오를 짜고 오라토리오처럼 극음악으로 만들었어요. 교향곡 9번에는 ‘스토리라인’이 있습니다. 베토벤이 음악의 언어로 철학을 쓴 신념 고백이에요.”
대본대로 작곡해야 하는 오페라와 달리 오라토리오는 극음악의 대본을 작곡가가 직접 개입해 텍스트를 삽입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다. 베토벤이 합창 도입부 서창(레치타티보)에서 “오 벗이여, 이런 소리는 그만! 이제 우리 목소리를 내보세, 더 기쁘게!”라고 쓴 가사는 실러의 원시에는 없다. 이 제안의 실제 화자는 베토벤 자신이다.
음악은 악기나 사람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음파, 즉 특정 주파수의 공기 진동이 어우러진 ‘떨림’과 ‘울림’이다. 구자범은 ‘울림’에서 더 나아가 ‘어울림’을 강조했다.
“우리말 자음 조합 중 ‘ㅇㄹ’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뜻하는 낱말이 많아요. 얼, 아름답다, 아람(열매), 울림 같은 거죠. 울림은 ‘울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공명한다는 건 같이 웃는 게 아니라 같이 우는 거죠. 제가 합창단을 모으고,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연주자가 자기 음표만이 아닌 다른 연주자의 음표도 함께 볼 수 있는 악보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어울림’을 위해서입니다.” ▶구자범 블로그 중 ‘베토벤 9번 자유의 송가 우리말 번역’
글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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