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피해자 ‘공동 책임’ 가스라이팅…멈추려는 지난한 싸움

한겨레 2023. 4. 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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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_ 킬링 로맨스
영화사 이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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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해, 이혼해, 이혼해!” 여래(이하늬)가 남편 조나단(이선균)에게 소리친다. “뭐? 이혼?” 조나단이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리고 충복 밥(Bob)을 부른다. 이내 조나단의 옆에는 귤 수백개를 담은 상자가 준비된다. 여래는 구석으로 내몰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고, 조나단은 여래를 향해 귤을 던지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를 남기지 않는 폭력. 표적물과 거리를 둔 채 스포츠처럼 즐기는 폭력. 자신의 몸은 더럽히지 않지만 다른 모든 것을 더럽히는 폭력. 쌓여 있는 귤은 조나단에 대해 많은 걸 폭로한다.

이 장면은 <킬링 로맨스>(감독 이원석)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무게 추다. 영화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자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특별한 점이라면 그 여자 여래는 ‘여래이즘’이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슈퍼스타였다는 것. 여래는 7년 전 발연기 논란으로 도망치듯 남태평양의 ‘콸라섬’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백마 탄 왕자’,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100미터는 될 것 같은 흰색 리무진을 탄 부동산 재벌인 조나단 나, 일명 존나(John Na)를 만나 결혼한다.

7년 후, 여래는 한국에서 리조트를 개발하게 된 조나단을 따라 귀국한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려준 매니저와 팬들 덕분에 스크린에 복귀할 마음을 먹게 되지만, 아내를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남편 때문에 좌절된다. 함께 일하기로 했던 감독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여래는 조나단에게 묻는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조나단이 답한다. “영화에 투자를 좀 했지. 조건은 단 하나, 발연기 황여래는 절대 캐스팅하면 안 됨.” 이에 이어지는 절규가 “이혼해, 이혼해, 이혼해!”다.

“피해자, 이 관계 깰 유일한 사람”

남자 주인공 이름은 ‘존나’고, 여자 주인공 테마곡은 ‘레이니즘’을 ‘여래이즘’으로 개사한 비(정지훈)의 노래이며, 두 사람이 만난 섬 이름은 ‘콸라’(술에 잔뜩 취한 상태나 그런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꽐라’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인데다, 이선균이 시종일관 콧수염을 붙이고 나오는 이 황당무계한 영화는 오프닝 크레디트 이후 계속 당황하고 있는 관객들 앞에 갑자기 두렵고 기이한 날것의 폭행을 던져놓는다. 아주 절묘하게 계산된 타이밍이다. 그렇게 관객의 호흡을 잠깐 잡아챘던 영화는 그다음부터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난장판을 펼쳐놓는다. 여래가 자신의 오랜 팬이었던 사수생 범우(공명)와 손을 잡고 ‘존나 죽이기’ 프로젝트에 돌입하는 것이다.

2022년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가스라이팅’을 선정했다. 20세기 중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상대방을 내 뜻대로 조정하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후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에 의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학대’라는 뜻으로 구체화된다. 스턴은 “폭력이 단지 육체적인 것으로 정의되었던 시기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정서적 학대와 언어적 욕설을 가시화”(다이앤 슈스)했던 영화 <가스등>(1944)으로부터 ‘가스등 효과’라는 말을 고안해낸다.

영화사 이창 제공

2023년 4월, 한국 극장가에선 가스등 효과를 주제로 다루는 영화 세 편을 동시에 개봉했다. 드라큐라 백작에게 부동산을 팔러갔다가 ‘취업 사기’를 당해 100년이 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렌필드(니컬러스 홀트)에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준 <렌필드>(감독 크리스 매케이), 똑똑하고 아름다우며 비정형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지만, 그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단속하며 집착하는 애인과의 해로운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고학자 영실(옥자연)의 지난한 시간을 한겹 한겹 발굴하는 <사랑의 고고학>(감독 이완민), 그리고 <킬링 로맨스>다.

존나는 여래를 다양한 관계로부터 단절시키고 자존감을 짓밟으며 “당신은 환각, 조울증, 피해망상 환자”라고 세뇌한다. 이 세 작품을 모아놓고 보면 2010년대 이후 페미니즘 제4물결과 함께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가스라이팅 개념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스턴이 가스등 효과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스라이팅이 가능”하고,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공동 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가스등 탱고’라고 한다. 이건 단순히 피해자를 탓하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피해자인 당신이야말로 이 관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진실한 충언이다. 세 작품은 모두 피해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탱고를 멈추려고 노력하는가, 하지만 그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최고의 수미상관

지난 4월18일, 국민의힘 천하람 전남 순천갑 당협위원장이 문화방송(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젠더 갈등과 저출산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가 연애할 자유, 이성을 꼬실 수 있는 자유가 점점 사라져가는 이상한 나라가 돼가고 있다.” 그는 “사회적 규범에 잘 순응하는 남성들은 잠재적 성범죄자 프레임에 영향을 받았다”면서, 과거 정부가 만든 이런 프레임을 “깨고 넘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천찍OO(천하람 찍어야 자유로운 정치발언 지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여당의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정치인보다는 확실히 <킬링 로맨스>가 “무엇이 로맨스를 죽이고 있는가?”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더 고차원의 유머를 구사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로맨스와 그 외의 친밀함을 죽이는 건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폭력 그 자체다. 가스라이팅이란 말이 대중화되고 다양한 서사를 입는 건 이에 대한 대중의 각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래는 존나와 ‘안전이별’을 했을까? 결말은 극장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그게 무엇이 됐든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방식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근래 만나본 최고의 수미상관’이라고. ‘뭐야, 이게?’ 싶었던 영화의 첫 장면은 마지막 장면 때문에 완성되고, ‘이게 이렇게 된다고?’ 싶었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 덕분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이 역시, 절묘하게 계산된, 플롯이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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