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역 수세미 할머니부터 스포츠맨까지…손뜨개 열풍 “제3의 눈을 떠보세요”
1980년대만 해도 손뜨개질은 일상이었다. 간단한 목도리나 모자, 조끼에서 카디건까지 웬만한 액세서리나 옷은 집 안에서 뚝딱 만들어냈다. 1990년대 본격적인 패션 산업의 발달로 주춤했던 손뜨개가 코로나19 팬데믹이 촉발시킨 나만의 취미 찾기 열풍과 레트로 유행과 만나며 부활하고 있다.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글로벌 가방 브랜드에서는 뜨개 라인 가방을 출시하며 그 흐름을 따르기도 했다.
의정부역 ‘수세미 할머니’를 아시나요?
한 백발의 노인이 의정부역 5번 출구 한쪽에서 털실로 수세미 뜨기에 열중이다. Z세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할머니의 실시간 작품 활동을 감상 중이다. 할머니는 “개인 사정이 아니면 평일이고 주말이고 그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의정부역 수세미 할머니’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화제가 되면서 의정부역 주변에는 털실로 짠 수세미를 놓고 파는 또 다른 할머니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할머니의 수세미가 알려진 것은 지난해 가을이다. 한 누리꾼이 너구리 인형 모양의 수세미 사진과 함께 “지하철역에서 할머니 한 분이 뜨개질로 뜬 수세미를 팔고 계신다. 너구리가 너무 귀여워 참을 수 없었다”며 인증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SNS 특수’로 할머니의 용돈 벌이가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인기를 얻던 시점에 할머니 동생이 코로나19에 걸려 병간호를 해야 했기에 그간 좌판을 벌이지 못했단다.
“내 수세미가 그렇게 젊은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줄 몰랐지. 나는 동생 병시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도 몸이 좋지 않았거든. 인기? 글쎄… 잘 팔릴 때는 하루에 10개도 팔리지만 한 달에 3~4개밖에 팔지 못할 때도 많아요.”
할머니는 5년 전부터 수세미를 떴다. 원래는 호박잎을 뜯어다 시장 근처 노상에서 조금씩 팔다가 주변 상인들에게 밀려 의정부역 한쪽으로까지 쫓겨났다. 지하철역 앞에서 호박잎을 사주는 이는 좀처럼 없었다.
“어느 날 자주 왕래하는 이웃집에 놀러 가니 털실로 수세미를 뜨고 있더라고. 형형색색 예뻐서 ‘나도 한번 배워보자’ 해서 뜨기 시작했는데 재밌더라고. 호박잎 대신 내가 뜬 수세미를 갖고 나와서 판 것이 시작이야.”
한쪽 눈이 편치 못한 할머니가 형형색색의 수세미를 뜨는 데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병아리나 너구리 모양의 수세미는 장장 3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개당 1만원.’ 수세미 가격치고는 비싼 편이지만 ‘한 코 한 코’ 정성이 들어간 ‘할머니 손맛’에 이끌려 젊은이들은 먼 데서도 찾아와 기꺼이 지갑을 연다.
할머니를 만난 30분 남짓, 대여섯 명의 손님이 할머니의 좌판을 찾았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은 너구리 수세미 인형을 찾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화제의 ‘너구리 수세미 인형’을 만든 도안 디자이너 김효정씨
Z세대의 마음을 녹여버린 ‘너구리 수세미 인형’을 탄생시킨 이는 4남매를 키우는 주부이자 도안 디자이너 김효정씨다. 그는 너구리뿐 아니라 한두 달에 한 번씩 인형 수세미 도안 신작을 내고 있는 유명 손뜨개 인플루언서다. 그가 뜨개에 입문한 것은 2015년. 아이들의 모자를 떠주다가 어떻게 하면 더 귀엽게 만들 수 있을까 공부하고 찾아본 것이 도안 디자이너가 된 출발점이다.
“원래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 뜨개질뿐 아니라 라탄, 마크라메 공예 등 만드는 데에 취미가 있어요. 4남매 키우느라 시간 제약이 많아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아이들 재우고 도안 프로그램을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는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수세미 도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수세미 하면 동그랗거나 네모 모양뿐이었는데 인형 모양을 구상해 도안을 만든 이는 김효정씨가 처음이다.
“가볍고 거품이 풍성하게 나는 수세미 털실 재료인 아크릴사는 짜놓으면 동물 털과 비슷해요. 보들보들해서 인형 만들기 좋은 털실인데 수세미로만 쓰기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 장난감 겸 ‘반려 수세미’를 만들어보자 시작했습니다.”
의정부역 할머니를 통해 많이 알려진 ‘너구리 도안’은 총 4000장이 넘게 팔렸다. 뜨개질 특성상 뜨개 고수들은 모양만 보고도 도안 없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김씨는 작품 도안 대부분의 디자인 특허를 신청해놨다.
“뜨개질의 장점이자, 단점이랄까요? 초보자들도 누구나 쉽게 뜰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작권이 쉽게 지켜지지 않아요. 결국 본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영역이기도 하죠. 대신 블로그나 SNS을 통해 디자인 도용에 대한 제보가 종종 들어오곤 해요.”
김씨의 수세미 인형 첫 번째 고객은 아이들이다. 도안 만들기 과정에서도 김씨는 아이들의 의견을 귀담아듣는다.
“일단 아이들의 눈으로 이게 특정 동물로 보이는지 물어봐요. 애매모호한 의견이 나오면 다시 만들어야 해요.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귀여워하는 인형은 꼭 인기가 있더라고요.”
그는 남녀노소, 계절과 무관하게 손뜨개 붐이 일고 있는 이유에 대해 “뜨개 하면 할머니 스웨터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이제는 ‘힙한 취미’가 됐다”고 말했다. “손뜨개 제품은 기성품보다 비싸지만 소장하고 싶은 핸드메이드 제품으로 요즘 사람들의 가성비보다 ‘가심비’ 소비 패턴과 맞아떨어진 것 같다”는 분석이다.
더불어 그는 손재주가 있는 주부라면 ‘도안 디자이너’로 활동해 보기를 적극 추천했다. 도안 디자인은 약간의 기술과 상상력 그리고 뜨개질 솜씨만 있다면 독학으로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고 했다.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진 않지만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 간식비 정도는 보탤 수 있다고.
우리는 ‘뜨개 팡인’ “뜨개질로 뭉쳤어요”
지난 15일 오후 2시 서울 은평구 불광천 인근 한 카페에 각자 뜨갯거리를 든 이들이 모였다.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앉아 뜨개질에 여념이 없는 6인은 뜨개질 카페 소모임 ‘손으로 놀자’의 회원들이다. 매달 한 번씩 만나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거나 미처 몰랐던 뜨개질 정보를 나눈다. 대화는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들에게 “ ‘뜨개 팡인(뜨개 광인)’이 된 이유”를 물었더니 손뜨개 예찬론이 쏟아진다. 먼저 “뜰 때는 기대감, 만들고 나면 성취감이 드는 기분”을 손뜨개의 최고 장점으로 꼽았다. 또 손뜨개 제품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면 여지없이 주목받는다. 그럴 때 “내가 뜬 것”이라고 ‘잘난 척’도 할 수 있다. 또한 유행을 타지 않고 싫증 나지 않아 좋다. 생각이 복잡할 때 콧수를 세어가며 뜨다 보면 요동치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생각이 어느새 정리된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동전 지갑부터 요즘 유행하는 그립톡, 키링 등 소품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모임 내 최고령자 최영희 할머니는 5세, 7세 손자들의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스승의날 털실로 뜬 카네이션 브로치를 선물해 동네에서 ‘다정한 할머니’로 소문이 났다. 얼마 전에는 항암치료 중인 친구에게 직접 뜬 모자를 선물했다. 다양한 제품 만들기가 가능한 뜨개질은 할머니의 사회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됐다.
“손자가 둘이다 보니 층간소음은 늘 신경 쓰는 부분이에요. 아래층에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살고 있어서 요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무늬로 크로스백을 떠서 선물했더니 너무 좋아하잖아요. 별거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오가면서 이웃 간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아직 신혼인 이정민씨는 “요즘 수세미 뜨기에 재미 들렸다”며 “새 수세미를 만들었다는 빌미로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킬 수 있다”는 현실 고증 장점을 더한다. 이씨의 남편은 각양각색의 수세미를 눈앞에 두고 “골라 쓰는 재미가 있다”며 만족스러워한단다.
경기 고양시에서 법무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신혜주씨는 최근 ‘전세사기’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일감이 많아지면서 스트레스도 쌓였다. 신씨는 “의뢰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상담하다 보면 나도 기가 빠질 때가 있다”며 “퇴근 후 뜨개질에 몰두하면 어느 때보다 힐링을 느낀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정리된다”고 말한다. 신씨는 무료 법률 강의와 정서적 안정과 힐링을 주는 손뜨개 바자회 개최를 고려 중이다.
손뜨개 사랑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심신 안정이 필요한 직업군에 안성맞춤 취미다. 2021년 도쿄 올림픽 남자다이빙에 출전한 영국 국가대표 토머스 데일리가 대기 중 뜨개질하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이목을 끌었다. 손뜨개로 경기를 앞둔 긴장감을 털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다이빙 종목에서 동메달, 싱크로나이즈드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현재는 손뜨개 전용 SNS 계정(팔로어 328만명)을 운영하며 손뜨개 인플루언서로도 활동 중이다.
“수공예 인식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역 손뜨개 소모임 ‘손으로 놀자’를 이끌고 있는 뜨개질 선생님 정준화씨는 타고난 ‘뜨개 팡인’이었다. 뜨개질이 너무 하고 싶었지만 털실마저 귀했던 어린 시절, 그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닥나무 껍질, 칡넝쿨, 벼 심지를 실 삼아 뜨개질 놀이를 했단다.
그는 유럽이나 일본은 손뜨개로 만든 편물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장인 정신에 대한 대우가 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림, 도자기, 목공 작가나 기술자를 과거 우리는 ‘쟁이’라고 표현했죠? 손 기술을 가진 장인에 대한 대우가 너무 박했어요. 수공예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정서가 뜨개질에도 적용된 거죠. 그러다가 점점 손뜨개의 그 ‘유니크’한 아름다움이 인정받게 된 거죠.”
그는 손뜨개의 매력을 결과물보다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손뜨개질을 하는 기분과 상황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 행여 코 하나를 빠뜨린다고 해도 그게 어떨 땐 더 자연스러운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잘못 떠서 풀어야 할 상황이 와도 그건 결코 헛된 시간을 보낸 게 아니에요. 꼬불꼬불한 라면 모양 털실을 만들었잖아요(웃음). 진짜 마니아가 되면 실을 당겨 풀어내는 것에도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풀리는데요.”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취미가 손뜨개라고 하는데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 한곳만 응시하고 있다 보면 시력이 나빠지지 않을까? 정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뜨개질을 하다 보면 제3의 눈이 떠져요.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뜨개질을 할 수 있어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지점만 빼면 감각으로 뜨는 것이지 눈으로 뜨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는 손뜨개 모임을 주선한 이유를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된 ‘지하철에서 뜨개질 도와준 설’이란 글이 있다. 글쓴이가 지하철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계속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 잘못 뜬 부분을 손수 고쳐주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모르는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또 그 요청을 스스럼없이 들어주는, 소소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손뜨개만큼 나이와 성별이 무관하게 모든 이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하는 취미가 또 있을까?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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