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전세사기 피해자 두 번 울리는 정부 대책
왜 대책은 언제나 한 발 늦게 나오는 걸까?
어떠한 감시나 감독도 받지 않으면서 남 씨 일당은 이런 수법으로 인천 미추홀구를 자신들의 전세사기 무대로 활용했고, 그 결과는 아주 끔찍했습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만 2,479세대가 피해를 당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보통 왕이라 불렸던 전세사기꾼들은 수백 채, 수천 채씩 갖고 있었잖아.'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천 미추홀구의 피해 사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자본 전세사기' 수법의 경우와 달리 인천 미추홀구의 피해 주택에는 금융 기관의 저당권이 피해 세입자들의 보증금보다 선순위로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은 전세사기 혐의로 구속된 남 씨 소유 집들을 강제로 경매로 넘겨서 처분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체 피해 주택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23호에 대한 경매가 진행 중이고, 이미 87호는 경매를 통해 매각이 이뤄졌습니다. 여기서 매각이 이뤄졌다는 의미는 새로운 집주인이 나타나 피해 세입자가 하루아침에 쫓겨나야 하는 상황을 뜻합니다.
만약, 못 나가겠다고 버틴다면 그 순간부터 불법 점유자가 돼 각종 소송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피해자 입장에서 재구성해보면, 전세 사기 당해 보증금을 어떻게 회복할 방법도 없어 억울한데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집주인이 나타났으니 짐 빼고 당장 나가'라고 통보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 미추홀구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정부 관계자는 물론, 국회 등 자신들의 피해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피해가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경매를 멈춰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월과 지난달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 어디에도 '경매 중단'이라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피해자들이 나타나자 정부는 그제야 경매 중단이라는 조치를 내놨습니다.
물론, 정부가 경매를 멈추라고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피해 상황을 고려해 금융 기관들에 경매를 잠시나마 멈춰달라고 자율적인 협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제도권 금융 기관들은 전세사기 혐의로 구속된 남 씨에게 빌려준 돈을 당장 회수하지 않아도 버틸 여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경매 중단이라는 정부 조치에 적극 협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제도권 금융 기관들이 채권을 추심업체 등에 넘기고 손을 뗐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들 업체들은 당장 경매로 채권 회수를 못하면 경영상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부가 경매 중단을 요청한 뒤에도 법정에서는 여전히 경매가 진행되고 있는데, 대부분은 영세한 추심업체 등이 신청한 경매들입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 주택 가운데 무려 551채는 제도권 금융 기관이 아닌 채권추심업체나 개인 등이 채권자인 걸로 나타났습니다.
왜 대책은 언제나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걸까?
화곡동을 휩쓴 전세사기는 임대사업자로 둔갑한 바지사장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피해자들의 보증금만으로 무자본 주택 매입을 하는 방식입니다. 빌라의 경우 시세 정보가 불투명하다 보니까 피해자들이 통상 빌라 매매 가격과 같은 수준의 전세 보증금을 내고 전세 계약을 맺으면, 직후에 바지사장들이 나타나 보증금을 떠안는 조건으로 주택 소유권을 이전받는 것입니다.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는 점은 인천 미추홀구 피해 사례와 같지만, 이런 무자본 전세사기 수법의 피해자들은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갈 경우 가장 먼저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선순위 채권자가 됩니다.
화곡동에 집중됐던 무자본 전세사기의 피해자들은 전세 보증금을 포기하는 대신 경매에서 살고 있는 전셋집을 자신들이 매입할 수도 있고, 제3자가 매입할 경우 일부 보증금을 보전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유일한 피해 회복 방안입니다. 그런데, 피해 주택 가운데 상당수는 경매가 수개월 째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집주인의 체납 세금 때문입니다.
화곡동에서 시작돼 전국 각지로 퍼진 무자본 전세사기 수법의 특징은 바지 사장을 앞세워 단 기간에 수백, 수천 채의 주택을 매입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SBS가 지난 2월 실체 단독 보도한 '2400 조직'의 경우 바지사장을 앞세워 8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1천 채가 넘는 집을 무자본 매입했습니다.
이렇게 주택을 많이 보유하다 보니, 전세사기에 가담한 집주인에겐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폭탄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보유세를 부담할 경제적 능력이 없어 대부분은 체납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이렇게 체납된 세금을 피해자들이 살던 집이 경매로 팔리면 징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세금은 걷어야 하지만, 문제는 징수 방식입니다.
빌라 100채를 무자본 매입했던 바지사장에게 빌라 한 채마다 1천만 원의 보유세가 발생해 세금 10억 원이 부과됐지만 체납한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빌라 한 채가 경매에서 매각될 경우, 매각 대금 중에 해당 빌라에서 발생한 보유세 1천만 원은 정부가 징수해 가고, 나머지 매각 대금이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게 상식적입니다. 피해자들도 이런 방식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빌라 100채 가운데 어떤 것이든 먼저 경매에서 팔리면 집주인이 체납한 세금 10억 원 전체를 한꺼번에 징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경매에 나온 빌라의 감정 가격이 집주인의 전체 체납액인 10억 원보다 낮을 경우 피해 세입자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경우 법원에선 경매를 하더라도 선순위 채권자인 피해자에게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판단해 '무잉여 기각'처리를 합니다. 즉, 경매 자체가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천 채가 넘는 빌라를 무자본 매입했다가 지난해 돌연 숨진 바지사장 김 모 씨의 피해자 가운데 최소 200여 명은 이런 사유로 경매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피해 회복도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제 상황은 김 씨의 피해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무자본 전세 사기 수법의 피해자라면 누구나 어디에서든 겪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안상우 기자as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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