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69시간… 구로의 불편한 등대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배…
IT 근로자 노동현실 풍자한 말
최근 尹 정부 개편안으로 ‘시끌’
개편 논의 단초 IT 산업이 제공
여론 질타에 개편 시점 미뤘지만…
구로 등대 다시 켜질 가능성 높아
# 주당 근로시간을 늘리는 내용의 정부 근로시간 개편안. 말도 탈도 참 많습니다. '특정 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론화하면서 여론의 격한 반대에 부딪혔으니까요.
# 이 때문인지 정부는 한발 물러선 모습이지만, 개편은 수순처럼 보입니다. 정부는 여전히 "일이 몰릴 땐 오래 근무하고, 일이 없을 땐 오래 쉴 수 있기 때문에 이번 개편안은 기업과 노동자 모두에게 윈윈"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정말 그럴까요. 바쁠 땐 바쁘고 한가할 땐 한가할 수 있는 노동자가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을까요? 반대로 바쁠 땐 바쁘고 한가할 때도 바빠야 하는 게 우리네 노동현실 아닌가요?
# 더스쿠프가 이번 법정 근로시간 개편안에 단초를 제공한 IT산업 노동자의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봤습니다. '구로의 등대'와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는 과연 안전할까요? '視리즈' 근로시간 개편 탁상공론, 그 첫번째 편입니다.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말은 사실 '풍자'입니다. 과거 등대나 오징어잡이 배처럼 늦은 새벽까지 사무실 불을 켜고 강도 높은 근무를 하던 게임사의 자화상을 비꼰 말이죠.
'크런치 모드(Crunch Mode)'도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신작 게임 출시를 앞두고 개인의 삶을 희생한 채 집중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비상근무체제를 뜻합니다. 게임업계를 포함해 다양한 모바일 앱 서비스를 출시하는 IT산업에서도 주로 쓰였죠.
이곳에선 등대를 켜고 크런치 모드에 돌입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서비스에서 발생할 장애에 대비해야 했고, 새로운 서비스 개발 일정도 빠듯하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IT기업이 밀집한 판교나 구로 일대에서 일하는 개발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꼬집는 말이어서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 등 풍자가 가득한 신조어는 더 아프게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 이런 단어들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주 52시간 근로제(2018년 7월)'가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IT 개발자의 과로사가 이어지면서 이들 산업의 '반근로자적' 노동 행태가 뭇매를 맞았고, 당시 정부와 국회가 입법으로 문제를 해소했습니다.
주 52시간 근로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주일에 40시간(8시간×5일ㆍ법정근로시간)을 기본으로 일하고, 노동자와 회사가 합의하면 1주일에 12시간까지 추가로 연장해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이러든 저러든 한주에 52시간 넘게 일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겁니다. 이런 새로운 발판 위에서 상당수 IT기업이 야근을 당연시하는 문화를 떼치면서 등대나 오징어잡이 배 같은 말이 덜 쓰인 겁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구로나 판교 일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예전처럼 등대를 켜고 오징어잡이 배가 출항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미디어에서도 심심찮게 등대나 오징어잡이 배를 키워드로 다루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 고개 드는 등대의 악령 = 발단은 '주 69시간 근로제'로 불리는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입니다. 언급했듯, 지금 우리나라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연장근로시간을 '주 12시간'으로 제한했죠.
그런데 윤 정부의 개편안은 다릅니다. 연장근로시간을 일주일 기준으로 나누는 건 너무 획일적이니 월간ㆍ분기ㆍ반기ㆍ연간으로도 나눌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가령 1주에 12시간인 연장근로시간을 한달로 따지면 총 '52시간(12시간×4.345주)'인데, 이 52시간을 업무가 바쁜 주에 더 많이 분배하고, 한가한 주엔 덜 배정하는 식으로 변화무쌍하게 쓰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근로시간이 무한정 늘어나는 게 아닙니다. 24시간 중 연속 휴식 시간인 11시간과 법정 휴게시간인 1.5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에 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11.5시간이 되는데, 주 6일 근무 기준으로 따지면 69시간이 됩니다. 물론 연장근로시간의 총량이 늘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기간을 따져보면 일을 더 많이 하는 건 아닙니다.
특정 주에 69시간을 일했다면, 차후엔 일한 만큼 더 쉴 수 있기 때문이죠. 일이 많을 땐 많이 하고, 없을 땐 쉬는 게 사업주와 노동자 모두에게 좋지 않냐는 게 정부 개편안의 취지입니다.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을 두고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당연히 격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3월 국민 1003명을 대상으로 근로시간 개편안과 관련된 의견을 물어본 결과, "바쁠 때 몰아서 일하고 길게 쉴 수 있어 찬성한다"는 응답은 36.0%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불규칙ㆍ장시간 노동, 삶의 질 저하가 우려돼 반대한다"는 응답은 56.0%로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현행 '주 52시간 근무제'와 관련한 질문엔 "적정하다"는 응답이 60.0%로 조사됐을 정도로 정부 개편안을 둘러싼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잔뜩 일한 만큼 잔뜩 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주 69시간 근무는 너무 길다는 겁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2022년 전국 워라밸 실태조사'에 따르면 취업자가 원하는 주간 희망 근로시간은 36.7시간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런데 이 개편안이 유독 구로와 판교에서 시끄럽게 회자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편의 단초를 제공한 게 IT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2021년 7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떠오르던 시절의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스타트업 업계를 만났더니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호소했다.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발언은 곧장 구설에 올랐습니다. '주 120시간 근무'를 하려면 단순하게 따져 봐도 주 5일제에서 하루 24시간씩 일해야 하기 때문이죠.
당시 윤 대통령은 별도 입장문을 내고 "IT 스타트업 업계에서 주 52시간의 획일성을 지적했다는 얘기일 뿐, 실제로 120시간씩 과로하자는 취지가 전혀 아니었다"고 황급하게 수습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개편안을 보면 주 120시간이 주 69시간으로 줄었을 뿐, 주 52시간 제도의 유연화를 꾀하겠다는 점에선 똑같습니다. '업종별 특수성'을 고려해 근무를 하자는 건데, 'IT 산업'이 그 대표 업종으로 거론된 덴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IT 산업엔 24시간 365일 실시간으로 운영되는 서비스가 많습니다. 고숙련 인력의 집중 근로가 필수인데, 주 52시간 제도에 가로막혀 운영이 쉽지 않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왔습니다. 윤 대통령이 만난 IT 스타트업 관계자가 주 120시간 근로제 얘길 꺼낸 것처럼 말이죠.
결국 주 69시간 제도를 시행했을 때 가장 많은 변화를 겪어야 할 산업은 IT분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업종의 회사가 바쁠 때만 바쁘고, 널널할 땐 한없이 널널해서 개편안의 연장근로시간 조정이 필요한 건 아닐 테니까요.
구로디지털단지나 판교테크노밸리가 술렁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개편안의 직접적인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유검우 IT노조 위원장은 "주 69시간 제도는 구로 등대의 불을 다시 켜는 제도"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초장시간 노동으로 폭주하던 IT산업이 주 52시간 근무제 덕분에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습니다. 다만, 입법 이후에도 법적 상한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업주가 적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을 개정해 한주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놓으면 눈치조차 보지 않는 사업주들이 덩달아 늘어날 겁니다. 수많은 IT산업 노동자가 과로와 산업재해의 위험에 시달렸던 게 불과 몇년 전의 일입니다. 이번엔 얼마나 많은 비극이 일어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정부가 내세운 개편안이 당장 이뤄지긴 어렵습니다. 지난 17일 개편안 관련 입법예고기간이 끝났지만, 정부는 "기한에 구애받지 않고 당분간 의견 수렴을 지속하겠다"면서 여론의 추이를 살피고 있습니다. 당초 정부는 6~7월 국회에 입법안을 제출하겠다는 로드맵을 밝혔지만, 이 계획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로의 불편한 등대가 다시 켜지는 건 아닐까요? 이 질문의 답은 '근로시간 개편과 탁상공론' 두번째 기사를 통해 알아보시죠.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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