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 외관 그대로…“유산 지켜야, 결국 와인 맛으로 이어져”
‘키안티 클라시코’ 500여 농가 “자연에 맡기는 게 농부의 미덕”
콩·소똥·야생효모도 포도 재배 일조…농가 절반 이상 ‘유기농법’
구름을 자로 잴 수 있을까. 바람이 밀고 시간이 잡아끌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우리 삶 같은 구름을 재는 일이 가능할까.
지난 13일(이하 현지시각)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에서 <구름 재는 남자>를 만났다. 사다리 위에서 커다란 뭉게구름을 향해 팔 벌린 채 자를 들고 서 있는 남자는 2018년 부산 해운대에서도 선보인 적 있는 벨기에의 거장 얀 파브르의 작품이다. 와인농장 ‘콜레 베레토’에 설치된 이 작품은 농장주의 철학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자로 구름을 잴 수 없으니)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인간을 비꼬는 청동상이다. ‘세상에 네 뜻대로 되는 건 없다. 그러니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걸 표현한 것”이라고 농장 직원 베르나르도 비앙키가 말했다.
이어서 덧붙였다. “2015년엔 좋은 포도가 많이 수확돼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 하늘이 다 한 것이지, 우리가 한 건 없다.” 토스카나주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위치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키안티 클라시코’라고 통칭한다. 자연을 겸손하게 살피고, 그 섬세한 흐름에 모든 걸 맡기는 것이야말로 농부의 미덕이란 게 협회 소속 500여개 키안티 클라시코 생산 농가들의 운영 철학이다. 지난 12일부터 4일간 이 지역 와인농장 11곳을 돌아봤다. 프랑스 디저트 여행, 스위스 몽블랑 트레킹 투어처럼 그 지역 특색에 맞춤한 여행이다.
“물 타지 않고 포도가 즙으로”
12일 도착한 와인농장 ‘폰토디’에서 여행객을 단박에 사로잡은 풍경은 꼬막 껍질 줄무늬처럼 가지런히 심어진 포도나무였다. 나지막하게 이어진 포도밭 능선은 구름마저 낮게 깔려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북쪽의 피렌체와 남쪽의 시에나 사이에 위치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생산 지역은 낮은 산과 언덕, 계곡을 두루 아우른 곳으로 해발 400~500m에 위치해 있다. 이탈리아 토착품종 산조베세가 80% 이상 들어가는 게 특징. 나머지는 역시 토착품종인 카나이올로, 콜로리노 등으로 채운다. 하지만 최근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같은 다른 나라 품종을 섞는 농가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올리브 생산 밭까지 포함해 110헥타르를 소유한 폰토디도 해발 400~450m에 있다. 투어에 동행한 김상미 와인 평론가는 “구조감이 탄탄하며 힘과 우아함을 겸비한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평했다. 키안티 클라시코 협회 회장이자 폰토디의 주인인 조반니 마네티는 “포도를 사서 와인을 만들지 않는다. 직접 길러서 양조한다. 유기농 재배만 30년째다. 바이오다이내믹 양조법을 고수하는데, 이게 우리를 독특하고 특별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포도나무들 사이에서 자란 노란색 콩과류 식물이 눈에 띈다. “지력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말한 그는 해충 피해를 막기 위해 꿀벌 등 곤충도 키운다고 한다. 포도 껍질에 붙은 야생 효모가 이 와인농장 맛 생산의 한 축이다. “인공 효모가 아니라서 발효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기에 인내력이 필요하다.”
이어 그가 안내한 곳엔 암소 65마리가 있었다. 풍경은 명화처럼 서정적인데, 고약한 냄새가 코를 강하게 타격했다. 그는 “유기농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싼 똥이 퇴비가 된다. 포도 나뭇가지, 와인 찌꺼기 등과 함께 삭혀 쓴다”며 아침마다 발효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고 한다. “양조자는 예술가”라는 그의 자부심은 이런 고집에서 나오는 듯했다. 현재 이 지역 농가의 52%(지난해 기준)가 유기농 재배에 매달리고 있고, 향후 그 수는 늘 전망이다.
“생산 와인 60%는 현지에서 소비되고 40%만 수출하는데, 아시아는 20년간 일본에만 수출했다. 한국에도 우리 와인을 선보이고 싶다.” 콜레 베레토의 비앙키가 웃으며 희망을 말했다. 자부심은 그 역시 강했다. “물을 전혀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 포도가 즙이 되게 두는 등 양조 과정이 자연에 기댄 것이기에 생산량이 적은 편이다.” 전체 농지 100헥타르 중에 포도밭은 고작 20% 정도. 코팅이 안 된 콘크리트 탱크, 스테인리스스틸 통, 오크통 모두 사용하는 게 이 농장의 특징 중 하나다. “(천연방부제 역할을 하는) 탄닌이 오크통에서도 슬그머니 나와 포도 탄닌과 결합하면 그만큼 탄탄한 탄닌은 없다.”
양조 방식 못지않게 토양의 질도 와인 생산에 중요하다. 14일 찾은 ‘라 살라 델 토리아노’의 포도밭에서는 새순이 하나둘씩 돋아나고 있었다. 이곳도 노란색 콩과 식물이 잔뜩 자라고 있었는데 양조 전문가 오비디오 무냐이니는 “이 식물들은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땅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알베레세, 갈레스트로, 마차뇨 같은 돌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마그네슘·인 같은 성분이 있는 이 돌들이 부서지면서 이 지역 점토를 형성하고, 결국 이 지역 특색인 석회질이 풍부한 토양을 만든다.” 층층이 겹친 채 느리게 몰려다니는 구름떼가 이날 포도밭에도 농부의 ‘느린 열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전통 지키려 지붕을 들어 올리다
와인농장 ‘로카 델레 마치에’ 초입에는 성인 남자 두배 크기의 커다란 검은색 수탉 조형물이 있다. ‘검은 수탉’은 키안티 클라시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모든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엔 이 상징물이 부착돼 있다. 이것의 기원은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지역 탈환을 위해 전쟁 중이던 피렌체공화국과 시에나공화국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국경선을 정하게 됐다. 각 공화국에서 선발된 기사가 수탉이 울면 말을 타고 달려 둘이 만나는 지점을 국경선으로 정하기로 한 것. 시에나공화국은 잘 먹인 흰 수탉을, 피렌체공화국은 며칠간 굶긴 검은 수탉을 골랐다. 당일 검은 수탉은 배고픔에 날이 밝기도 전에 울어서, 결국 피렌체공화국은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질 낮은 복제품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33개 농가가 협회를 구성한다. 승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검은 수탉이 상징물로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이곳의 볼거리는 또 있다. 스턴트맨 출신 영화 제작자였던 창업자 이탈로 칭가렐로의 영화 인생을 담은 박물관이 있다.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은 와인농장도 있다. 12일 오후 6시, 저녁 햇살이 마지막 숨을 뱉고 있었다. 짖지도 않는 털북숭이 개 스피가가 여행객을 맞는 ‘카스텔로 디 볼파이아’. 차가운 중세풍 돌바닥을 사분사분 걸으며 여행객을 끌어당기는 스피가는 마을이 생긴 1172년부터 주인인 양 행세하는 듯했다.
개 주인인 농장주의 딸 페데리카 마스케로니 스티안티가 양조장, 숙성고, 와인 숍 등으로 쓰는 10여개 건물의 안내에 나섰다. 철컥, 사람 한명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고 낡은 중세풍 문을 열자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스틸 발효 통들이 보였다. 스티안티는 “창문, 벽이 다 수백년 전과 같다”고 말한다. 출판업자였던 그의 할아버지 라파엘로 스티안티는 1960년대 낡아만 가던 이 지역 건물과 땅을 사서 8년 만에 지금과 같은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자 이젠 1년에 8000명 이상이 찾을 정도로 명소가 됐다.
건물이나 외관이 수백년 전과 다를 바 없다면 커다란 숙성 통이나 각종 현대적인 기계들은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지붕을 통째로 들어 올려서 숙성 통을 넣었다. 지역의 작은 유산이라도 지키려고 한다. 이런 노력이 결국 와인 맛으로 이어진다.”
역사와 현대미술까지 품은 와인 한잔
‘카스텔로 디 아마’는 카스텔로 디 볼파이아와 달리 ‘현대미술’을 붉은 와인에 담았다. 13일 주인 마르코 팔란티가 처음 안내한 작품은 프랑스의 거장 다니엘 뷔렌이 야외정원에 설치한 거울 작품. 길게 이어진 거울 벽의 중간은 뚫려 있는데, 그 너머에 있는 포도밭은 계절마다 시간마다 무수한 변화를 일궈낸다. ‘마망’이라는 거미 구조물로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 세계적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 등의 작품들도 보물이 숨겨져 있듯 농장 이곳저곳에 박혀 있다. 한국 작가는 없을까. 와인 애호가로 알려진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 어둑한 건물 지하에 있다. 모든 작품은 여행객들에게 공개돼 있다.
‘카스텔로 디 베라차노’의 역사는 세계사를 관통한다. 농장주의 딸 마리아 솔레 카펠리니는 “뉴욕을 최초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역사가 이곳에 있다”며 그에 관한 낡은 기록물을 꺼내 보여줬다. “그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 사망한 1890년대 이후 우리 집안(카펠리니 가문)이 소유한 것으로 안다.” 시간의 흔적이 잔뜩 묻은 고풍스러운 저택과 손가락의 미열조차 부식 요소로 작용할 것 같은 기록물이 조용히 속삭이는 듯하다. ‘사람이 바뀌어도 이 땅은 여전히 싱그러운 포도밭이 지키고 있다’고 말이다.
가장 단순한 게 최고로 화려하다고 했다. 이는 14일 방문한 ‘카스텔로 디 퀘르체토’의 마스코트 공작 5마리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해 보였다. 그중 1마리는 온통 흰색인데, 하얀 날개를 부채처럼 펼치자 방문객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100년도 훌쩍 넘은 역사를 지닌 이 농장은 초창기 협회 창단에 초석이 된 33개 와인농장 중 하나다. 건물 대부분은 500여년 전에 지어졌다. 200헥타르 중 65헥타르가 포도밭인 이 농장엔 1960~70년대부터 저장해둔 와인이 지하 저장고에 즐비하다. 주인 알레산드로 프랑수아는 먼지가 뽀얀 와인병을 꺼내 보이면서 “옛날 방식 그대로 양조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모든 게 오래되었지만, 초라하진 않다. 와인이든 사람이든 ‘늙음’엔 세월을 버틴 지혜가 녹아 있게 마련이다. 붉은 노을을 달고 저무는 키안티 클라시코 생산 지역의 하늘에 진한 와인 향이 넘실거린다.
토스카나/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키안티 클라시코 탐방 꿀팁
키안티 클라시코 협회에 소속된 다수의 와인농장은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더러는 게스트하우스까지 갖고 있어 와인 시음에 나서는 이들을 반긴다. 누리집으로 예약이 가능한데 시음에 앞서 몇가지 알아둘 게 있다.
· 포도 질, 숙성 기간 따라 3등급 = 세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최고급은 키안티 클라시코 그란 셀레치오네, 그다음이 리세르바이며 가장 대중적인 등급이 안나타다. 그란 셀레치오네는 단일 품종을 재배하는 전용 경작지(싱글 빈야드)에서 재배된 포도나 그해 가장 질 좋은 포도로 만드는 게 특징. 최소 30개월 숙성이 기본. 리세르바는 24개월, 안나타는 최소 12개월이 기본이다. 와인의 맛은 전반적으로 탄닌과 산도가 적고 부드러운 보디감에 과일 향이 풍부하다. 한국은 미국, 스위스, 일본 등과 함께 키안티 클라시코의 주요 수출국이다.
· 시음 첫 단계 ‘색깔 보기’ = 흰색 종이나 테이블보 위에 잔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색을 본다. 심홍색, 진홍색, 적색, 벽돌색, 갈색 등을 따져본다. 잔을 흔드는 이유는 더 많은 산소가 와인과 결합해 더 풍부한 부케가 발산되게 하기 위함이다. 와인 향을 맡는 것은 시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세번 맡는다. 처음과 마지막의 향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양쪽 콧구멍을 차례로 막고 맡는다. 콧구멍마다 맡는 향이 다르다. 특히 품종별 와인 향을 적어 두고 기억해 두는 게 좋다. 맛보기는 입안에 와인이 골고루 도포되도록 천천히 음미한다. 최소 3~5초 머금는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도서 및 자료 <와인바이블>, 키안티 클라시코 협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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