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통에 재소자 내팽개친 교도관들…국가 책임일까 [법원 앞 카페]
우종환 2023. 4. 22. 09:01
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현재 70대가 훌쩍 넘은 김규찬 씨는 아버지를 직접 본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태어났을 때 이미 형무소에 있었고, 어린시절 아버지를 면회로 몇 번 봤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나면서 아버지가 행방불명돼버렸기 때문입니다.
규찬 씨는 많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법원을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행방불명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전쟁 통에 교도관들이 아버지를 비롯한 재소자들을 내팽겨친 채 달아났고 이에 남겨진 제소자들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는 거죠.
어찌 된 사정일까요?
여순 사건과 실종
때는 지난 1948년 10월, 해방된지 3년 밖에 안 된 당시 규찬 씨의 아버지 김영기 씨는 23살이라는 나이에 순천역 열차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영기 씨에게는 아내와 4살짜리 딸이 있었고, 아내는 둘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아들 규찬 씨였습니다.
같은달 19일 영기 씨가 타고 있던 열차는 전북 익산에서 출발해 전남 순천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시민들이 많이 타고 있었던 평소와 다름없는 열차 운행이었죠.
그런데 순천역에 도착한 순간 역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객실을 달라고 요구했고 영기 씨는 총부리를 들이미는 군인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요구에 따라 이들을 열차에 태워줬습니다.
그리고는 하루가 지난 20일 아침, 영기 씨가 살던 철도 관사로 한 군인 무리가 쳐들어오더니 영기 씨를 체포했습니다. '내란죄'를 저질렀다는 이유였습니다.
알고보니 전날 영기 씨에게 열차 객실을 내어달라고 요구한 이들은 바로 '여순 반란군'들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이었죠. 영기 씨를 체포한 군인들은 진압군이었습니다. 내란죄로 기소된 영기 씨는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됐다가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습니다. 영기 씨는 목포형무소에 수용됐다가 마포형무소로 이감됐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북한군은 마포형무소가 있던 서울을 점령했고 이후 영기 씨의 행방은 알 수없게 됐습니다.
재심부터 배상까지
이후 수십년 간 잊혀졌던 영기 씨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한 세기가 바뀐 2000년대였습니다. 이제까지는 영기 씨도 '여순 반란'의 가담자였기 때문에 행방이 묘연했다 한들 명예회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진화위는 민간인 439명이 반군에 협조하거나 가담했다는 이유로 군경에 무리하게 연행돼 살해됐다고 인정하고 이들을 여순 사건의 민간인 희생자로 확인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후 많은 여순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 결정과 무죄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규찬 씨는 지난 2020년 5월 아버지 영기 씨에게 내려진 내란죄 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약 6개월 뒤인 2021년 1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영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국가가 잘못된 권력을 사용한 게 인정된 만큼 규찬 씨는 이어 국가배상 청구도 진행했습니다.
지난해 10월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규찬 씨 등 가족들에게 모두 6,000만 원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선고했습니다. 영기 씨에 대한 구금부터 가혹행위, 잘못된 군사재판까지 국가의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은 정당한 사유 없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고 김영기 씨를 강제연행하여 구속영장 없이 불법으로 수용시설에 구금했고, 목격자에 따르면 '영기 씨의 다리가 뒤틀려 무릎뼈와 정강이뼈가 다 보이는 상태였다'는 취지로 진술한 내용으로 볼 때 폭행과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공소제기 절차가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게 해 신체의 자유,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했다.
- 1심 선고
- 1심 선고
행방불명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런데 1심 법원은 영기 씨가 '행방불명'된 데에는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봤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재판 과정에서는 영기 씨가 어떻게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는지에 대한 정황이 어느정도 드러났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목격자들의 증언 등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마포형무소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내버려둔 채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사흘 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북한군이 형무소 재소자들을 풀어줬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증언했습니다.
석방된 영기 씨는 이후 고향인 목포로 가려고 열차를 탔다가 군경에 체포된 걸로 추정됩니다.
제출한 증거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이 와서 마포형무소의 문을 열어 줘 수감자들이 다 나오게 됐고, 그때 영기 씨도 나오게 되었다', '영기 씨가 탑승한 철도에서 군인과 경찰이 검문을 하면서 머리 짧게 깎은 사람들을 검문해서 잡아가고 그랬다', '영기 씨가 잡혀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기 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용산역에서 철도에 탑승하는 것이었다'
- 1심 선고
- 1심 선고
규찬 씨 측은 ▶1차적으로 형무소 교도관들이 전쟁 통에 재소자들을 석방하지 않은 채 도망갔고 ▶이후 군경에 의해 체포된 뒤 행방불명됐으니 국가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심 법원 판단은 달랐습니다. 석방하지 않은 건 전쟁이라는 상황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이후 다시 체포된 과정은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제출된 증거만으로 영기 씨가 행방불명되는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의 불법 체포 등 위법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부족하고,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영기 씨가 수감에서 풀려난 직후 피난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고 하여 이를 국가의 불법행위로 평가할 수도 없다.
- 1심 선고
- 1심 선고
2심 판단은?
규찬 씨는 1심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6일 2심 선고가 나왔습니다. 이날 서울고법 민사5부(설범식 부장판사)는 규찬 씨 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1심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죠.
2심 법원은 국가의 책임이 인정되려면 공무원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피해자가 입은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하는데 영기 씨의 행방불명에 대한 책임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마포형무소 소속 공무원들이 한국전쟁 당시 영기 씨를 포함한 수형자들을 안전하게 석방하거나 이송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피구금자가 제3자에 의해 구금상태에서 벗어난 뒤 행방불명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결과라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고 주장에 의하더라도 영기 씨는 마포형무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석방된 뒤 혼란한 전시상황으로 인해 행방불명에 이른 걸로 추정되므로 마포형무소 공무원들의 과실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과실과 행방불명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 2심 선고
- 2심 선고
2심 재판 과정에서 규찬 씨 측은 마포형무소 교도관들과 달리 전쟁 중 위험을 무릅쓰고 수형자들을 석방하거나 이송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마포형무소가 위치한 서울이 함락됐으므로 마포형무소 소속 공무원들은 전시상황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걸로 보이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수형자들을 안전하게 석방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송할 인적·물적 자원도 충분치 않았을 걸로 보인다.
- 2심 선고
- 2심 선고
교도관들은 정말 잘못이 없나?
영기 씨가 수감됐던 마포형무소에는 한국전쟁이 벌어질 당시 3,500여 명이 수감 중이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재소자들은 형무소를 나온 뒤 수원 등지에서부터 검거가 되면서 집단 학살당한 경우가 많은 걸로 파악됩니다.
전쟁 중 이런 식의 재소자 학살은 비단 마포형무소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1950년 6월부터 7월까지 군경은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끌어내 야산에서 집단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또는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영기 씨 같은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그리고 제주 4·3사건 관련 재소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전쟁 당시 대부분의 교도관들은 마포형무소처럼 재소자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나거나, 대전형무소처럼 재소자들을 마음대로 학살하는 식으로 처리했습니다. 영기 씨는 두 경우 모두의 피해자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교도관들에 의해 버려진 건 사실로 드러났고, 이후 다시 검거돼 학살당한 많은 피해자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대전형무소 희생자들은 실제 학살피해를 당한 게 맞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도 재소 기록과 증언 등 주변 기록만으로 행방불명자가 학살피해자로 인정된 판례가 꽤 있습니다. 지난 2016년 대법원은 대전형무소 수감자 중 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재소자들이 학살당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고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순사건을 연구하고 재심 판결에도 많은 기여를 한 여수10·19항쟁 연구가 주철희 박사는 "영기 씨 같은 마포형무소 행방불명자들은 누구에게 체포되고 학살됐는지 그것을 국가가 한 게 맞는지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규찬 씨가 대법원에 상고하게 되면 대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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