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투자 뚝, 감독은 OTT 러시… 한국 영화가 죽어간다 [빨간불 켜진 K콘텐츠]
유명 감독까지 "힘들어도 드라마 해야"
"영화 스태프 70%가 일감 없어 놀 지경"
국내 유명 영화감독 A씨는 요즘 드라마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대형 투자배급사로부터 투자를 받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그의 상황은 최근 급변했다. 영화 투자를 받기 위해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 그는 드라마 극본을 쓰고 있다. A씨는 “드라마는 영화보다 더 많은 분량을 준비하느라 힘들지만 일을 지속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A씨의 사례는 특별한 게 아니다. 최근 영화계에선 “돈이 말랐다”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투자배급사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새 영화 제작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가가 되살아날 기미를 안 보이자 돈이 몰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투자가 끊기면서 신작이 사라지고 극장에는 상영할 화제작이 없어지게 돼 다시 투자가 얼어붙는 악순환이다. 2020년 ‘기생충’(2019)의 오스카 4관왕 등극 등 K콘텐츠 선봉장으로 여겨지던 한국 영화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회복되지 않는 반 토막 수치
한국 영화의 위기는 통계로 뚜렷이 나타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2월 내놓은 ‘2022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영화산업 전체 매출(외화 포함)은 1조7,064억 원으로 2019년(2조5,039억 원)의 68% 수준이다. 1인당 연평균 극장 관람 횟수는 2.19회였다. 2019년 세계 최고를 기록했던 4.37회의 절반이다.
한국 영화만 놓고 보면 더 암울하다. 순수 제작비만 30억 원이 넘는 상업영화 36편의 평균 수익률은 -0.3%로 추정된다. 돈 벌기가 주요 목적인 상업영화가 전반적으로 적자를 기록한 셈이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 관객은 급속히 줄어 올해 시장점유율은 28.9%(18일 기준)에 불과하다.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관객 100만 명 이상을 모은 건 ‘교섭’(172만 명) 단 1편이다. 관객이 극장을 잘 찾지 않고 제작비 회수가 어려워지니 한국 영화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급속히 식고 있다.
한국 영화가 극장에서 돈을 못 벌자 만들어놓고도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쌓여가고 있다. ‘재고 영화’들은 90편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영화들은 적당한 개봉 시기를 못 정하고 있다기보다 개봉 비용조차 구하지 못해 극장에 선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2021년 촬영을 마친 한 상업영화는 아직 개봉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개봉 비용을 투자하는 이가 없어서다. 1,000만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연기 호흡을 맞추고 유명 시나리오 작가가 참여했다는 점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한국 영화들은 보통 제작 단계에서 투자자를 모으고 개봉 시점에 추가로 투자자를 찾는다. 흥행 실패에 따른 위험도를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개봉을 위해선 자체적으로 돈을 더 넣어야 하는데 위험을 홀로 감당하기에는 시장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며 “새 영화 투자는 둘째치고 만든 영화도 처리 못 하는 형국”이라고 한탄했다.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큰손으로 꼽히는 CJ ENM의 경영 악화 역시 투자 악화 요인으로 꼽힌다. CJ ENM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53.7% 감소했고, 순손실은 1,657억 원에 달했다.
사라진 영화… 극장 공동화 가능성
새 영화가 실종된 정황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한국 영화 촬영 산실로 여겨져 온 한 촬영소에는 최근 영화를 찍겠다는 문의가 뚝 끊겼다. 촬영소 관계자는 “얼마 전까지는 하루에 한 번꼴로 촬영소 대여를 위한 전화가 오고는 했다”면서 “하지만 문의 전화를 받아본 지 3주가 넘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유명 배우들이 소속된 대형 매니지먼트 회사에도 영화보다 드라마 출연 제안이 더 많다. 설경구와 류준열 , 라미란 등이 속해 있는 씨제스스튜디오스 관계자는 “예전에는 영화 출연 제안이 많았으나 요즘은 7대 3 비율로 드라마 쪽 의뢰가 더 높다”며 “영화라 해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공개를 염두에 둔 영화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새 영화 제작이 급감하자 인력은 드라마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준익, 김지운, 김성호, 강윤성 이경미, 한준희 등 기성 감독들이 OTT 드라마를 만든 데 이어 영화계 유망주들 역시 드라마 연출에 나서고 있다.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과 아카데미상 각본상을 함께 받은 한진원 작가는 OTT 티빙 드라마 ‘러닝메이트’로 연출 데뷔에 나선다. 주목받던 영화계 신인이 드라마로 감독이 되는 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영화 스태프 70%가량이 놀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며 “이들 대부분이 드라마 촬영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영화계에선 2, 3년 후가 더 큰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재고 영화 90여 편이 2년가량에 걸쳐 개봉되고 나면 극장을 채울 한국 상업영화가 없다는 우려에서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 기획 개발과 촬영, 개봉까지 보통 2, 3년은 걸린다”며 “지금 대처에 나서지 않으면 극장엔 외화나 저예산 한국 영화만 상영되는 최악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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